10년 전, 2010년 5월19일과 6월7일 경북 경주의 자동차부품 회사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의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 조합원들이 조직형태 변경 총회를 열었다. 산업별 노조 지회를 기업별 노조로 바꾸는 것이었다. 조합원 605명 중 544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률 95%(517명)로 발레오전장노조가 됐다. 2010년 2월 노조 파업을 이유로 직장폐쇄를 단행한 뒤 3개월 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노조 파업 유도→ 직장폐쇄→ 용역경비 투입→ 경찰력 투입→ 노조 핵심 간부 구속→ 기업노조 설립이라는 ‘노조 와해 매뉴얼’이 성공한 금속노조 첫 사업장이었다. 당시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장이던 정연재씨는 감옥에서 금속노조 탈퇴 소식을 들었다. 산업별노조인 금속노조의 규약에 따라 개별탈퇴가 아닌 집단탈퇴는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법보다 주먹. 공장에서 금속노조의 깃발은 내려졌다.
10년 전 발레오만도 민주노총 탈퇴 사건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의 주축 노조이고,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가장 모범적인 지역지부다. 경주의 최대 사업장인 발레오만도지회는 금속노조 200여 개 사업장 중에서도 최고 모범 노조였다. 2010년 당시 조합원 621명. 현대차를 비롯해 대기업 노조들이 성과급 경쟁, 주식 경쟁을 벌일 때 발레오만도지회는 기본급 인상에 충실하라는 금속노조의 지침을 따랐다. 대기업 노조들이 비생산라인 외주·용역화를 받아들였을 때도, 발레오만도지회는 청소·식당·시설 노동자를 끝까지 품어 정규직을 유지했다. 심지어 파견직이던 경비원도 파업을 통해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비정규직 0명 공장, 민주노총의 모범 노조가 발레오만도지회였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이명박 정부의 표적이 된 건 아니었다.
정연재씨는 2008년 7월을 떠올렸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항의해 5월2일부터 시작된 촛불이 하나둘 꺼져가던 7월15일 새벽. 당시 발레오만도지회 부지회장이던 그는 금속노조 간부 50여 명과 함께 새벽 경주 외동에 있는 자동차시트 제조업체 다스에 들어갔다. 몸싸움을 벌여 사무직을 밀어내고 본관 식당에 모였다. 야간조 작업을 마친 노동자들이 모였고, 출근한 주간조가 합류했다. 18년 동안 독재한 어용노조 위원장을 탄핵하고 민주노조 깃발을 세웠다. 당시 이명박의 매제인 김진 부사장은 독일 출장을 위해 공항으로 가다 돌아왔다. 민주노조를 인정하라며 파업을 벌여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 생산라인이 멈출 위기에 처하자, 그는 노조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당시 교섭에 참여한 경주지부 간부는 “파업이 12시간을 넘어가고, 야간에도 현대차 라인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명박의 매제인 김진 부사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부동자세로 전화를 받으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는데, 아무래도 대통령이 아닐까 싶었다”고 말했다.
김진이 이명박의 전화를 받았는지, 이명박의 형 이상득의 전화를 받았는지,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파업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일주일 이상 현대차 생산이 멈추는 절박한 상황에서 ‘높으신 분’께 승낙을 받아야 했다.
‘기업 프렌들리’를 내걸고 당선된 이명박. 뼛속까지 노동조합을 싫어하는 대통령의 집구석을 습격해 노조를 만들어 대통령 가족을 무릎 꿇게 한 금속노조 경주지부에 대한 적개심은 어떠했을까? 대통령의 고향이자, ‘만사형통’ 이상득 의원의 동네에서 벌어진 ‘대통령 집구석 민주노조 습격 사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MB의 안기부’ 공직윤리지원관실
다스에 민주노조가 세워진 직후 이명박 정부는 7개 부서 42명으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들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명박의 고향인 경북 영일·포항 출신 인사로 구성된 ‘영포라인’으로 구성됐다.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 진경락 기획총괄과장 등 고용노동부 출신이 대거 투입됐다. 이들은 비선으로 이영호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평화은행 노조위원장 출신), 최종석 행정관(고용노동부 출신)에게 보고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 사찰 공작을 벌였다.
촛불에서 벗어난 이명박 정부는 2009년 8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파업을 특공대를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어 복수노조 허용 조건으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는 법안과 회사가 노조 상근자(전임자)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노동조합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노동계는 민주노조를 와해하는 법이라며, 소수 노조라도 교섭권을 부여하고, 전임자 임금은 노사 자율에 맡기라고 요구했다. 2009년 12월30일 추미애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은 법안에 반발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회의장을 나가자, 회의실 문을 걸어 잠그고 표결을 강행했다. 정몽준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한국 정치에 있어 어두운 터널 끝에 희망을 보여준 사례”라고 칭송했다.
일명 ‘추미애 노조법’이라는 복수노조법을 손에 넣은 이명박 정부는 ‘민주노총 탈퇴, 제3노총인 국민노총 설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비실비실’한 노조들은 정부의 겁박에 쉽게 민주노총을 탈퇴했지만 ‘강성노조’인 금속노조는 달랐다. 치밀한 전략이 필요했다. 금속노조와 산별 중앙교섭을 벌인 경력이 있는 창조컨설팅이 앞장섰다.
금속노조 탈퇴 이후 감옥에서 나온 정연재 지회장은 “국정원이 내려와 다스를 깨봤자 신규 노조라 다스만 깨지고 잘못 건드리면 후폭풍이 커질 것이고, 20년 이상 민주노조 주축을 해왔던 발레오를 깨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 포항노동청과 경찰은 “다스만 금속노조 탈퇴하면 더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VIP 사업장을 건드렸으니 보복이 계속될 거라는 협박이었다. 그렇게 노동부와 경찰, 회사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경주와 포항에서만 발레오만도·광진상공·일진베어링·이너지·전진산업·영진기업·제철세라믹·국제강제가 금속노조를 떠났다. 경주에서 승리를 거둔 ‘이명박 노조 와해 전쟁’은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며 KEC·상신브레이크·유성기업·만도·콘티넨탈 등 금속노조의 핵심 사업장을 차례로 깼다. 다행히 2012년 경기도 안산의 SJM지회에서 창조컨설팅이 동원한 용역깡패의 폭력이 알려지면서 이명박의 ‘추악한 전쟁’은 멈추게 됐다.
100명 미만 사업장 98%에 노조 없어
10년이 흘렀다. 발레오에서 정규직이던 식당·청소·경비 노동자는 모두 비정규직이 됐다. 해고자로 7년을 길거리에서 싸워야 했던 정연재씨는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아 복직해 일한다. 강기봉 대표이사는 노조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실형을 살았다. 금속노조 조합원은 해고자뿐이었는데, 지금은 절반을 차지한다. 노조법에 따라 전체 조합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교섭대표노조가 되는데, 조만간 노동위원회에서 교섭대표노조가 결정된다.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노동조합 와해 10년 불의한 시대가 끝나간다. 민주노조가 살아나고,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 2019년 말 정부가 발표한 ‘2018 전국노동조합 조직현황’에 따르면, 노조가입률은 11.8%로 늘었고 민주노총이 처음 제1노총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노조가입률은 공공부문 68.4%, 300명 이상 대기업 50.6%로 북유럽 수준이지만, 30~99명 회사는 2.2%, 30명 미만 사업장은 0.1%에 그친다. 100명 미만 사업장 98%에 노조가 없는 게 현실이다. 형식적으로는 산업별노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업노조이기에 일정 규모가 되지 않는 한 노조를 만들기 어렵다. 코로나19 때문에 권고사직이나 해고를 당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를 찾는 직장인 대부분은 노조 밖 노동자다.
노동조합으로 가는 길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첫 번째는 ‘노조 혐오’의 문이다. 보수언론이 덧씌운 귀족노조, 강성노조라는 혐오와 왜곡을 거둬내야 한다. 대기업 노조들의 잘못도 있지만, 한국 사회 불평등과 비정규직 문제는 노조가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만들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노조로 가는 길, ‘노조 혐오의 문’을 열면 더 아득한 ‘복수노조의 문’이 기다린다. 추미애 노조법 때문이다. 몰래 모여 어렵게 노조를 만들면, 곧바로 회사가 기업노조를 만든다. 회사는 ‘콩쥐노조’(민주노조)원을 탈퇴시켜 ‘팥쥐노조’(기업노조)에 가입하게 하고, 콩쥐노조를 탄압한다. 회사는 대표노조가 된 팥쥐노조하고만 교섭해 두둑한 성과급을 찔러준다. 노조 하기가 독립운동만큼 힘들어진다.
사장 아들이 근로자대표 못하도록
결자해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만들었던 복수노조법부터 고쳐 소수노조에도 교섭권을 주자. 대통령 공약대로 산업별노조 같은 초기업 단위 단체교섭을 하도록 하고, 단체협약 적용 범위도 확대하자. ‘근로자대표’의 선출 절차, 임기, 구성, 권한을 명시해 사장 아들이 근로자대표를 하지 못하게 하자. 60% 넘는 대통령 지지율에 21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177석인데, 야당 때문에 안 된다고는 하지 않겠지?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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