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 경기도 안산 원곡법률사무소에서 만난 최정규 변호사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노동착취를 학대 범죄로 보지 않고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수사 관행은, 201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염전 노예’ 사건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2014년 1월, 전남 신안군의 섬 신의도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뭍으로 배달된다. 이 편지는 시각장애가 있고 지적 능력마저 미약한 김아무개(당시 40살)씨가 서울에 사는 어머니에게 보낸 구출 요청이자, 오랫동안 묵인된 ‘염전 노예’ 실상을 드러내는 신호탄이었다. 서울 영등포역 광장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김씨는 2012년 7월 신의도 한 염전으로 팔려가 상습 폭행과 대가 없는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같은 처지였던 지적장애인 채아무개(당시 48살)씨와 섬을 탈출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마을 주민은 이들의 소재를 번번이 염전주에게 일러줬다. 사실상 섬에 갇힌 신세였다. 김씨가 몰래 쓴 편지가 서울 구로경찰서로 전달된 뒤에야 그들은 섬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의도 지역 염전에서 짧게는 1년, 길게는 40년 동안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한 피해자 63명이 발견된다. 이들 다수는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힘든 지적장애인이었다.
‘염전 노예’ 참상이 드러난 지 6년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최정규 변호사는 이른 새벽 첫 KTX 열차를 타고 전남 목포로 향했다. 노숙인 복지 시설에서 지내던 염전 학대 피해자들을 처음 만나기 위해서였다. 피해자 63명 가운데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연락이 닿지 않는 20여 명에겐 법률 지원이 필요했고, 그 일을 최 변호사가 맡았다. 서너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학대 피해자 지원 활동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염전 노예 참상이 드러난 이후 지난 6년 동안 우리 사회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5월4일 경기도 안산시 원곡법률사무소에서 만난 최정규 변호사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노동착취를 인신매매나 학대 범죄가 아니라 울력(봉사노동)이나 품앗이로 보고,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수사 관행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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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염전 노예 사건에 대해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라며 철저한 재발 방지 대책을 주문했다. 가해자인 염전주 처벌과 피해자 구제 과정은 어땠는가.
“두 명을 제외하고, 염전주 대부분은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14년 2월까지 10년 치 최저임금(월 209시간)이 대략 8천만원이었는데 그 정도 금액으로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법원에 공탁하면 정해진 공식처럼 집행유예가 나왔다. 실형 선고는 8천만원을 마련하지 못하거나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될 만큼 폭행 정도가 심한 경우였다.”
가해자 처벌이 끝난 뒤 최 변호사는 염전주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2015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애초 국가 상대 소송은 생각지 않았다가 손해배상 소송에서 확보한 수사기록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수사기록에 ‘경찰도 (착취 상황을) 다 알았다’는 염전주 진술이 있더라. 학대 피해자가 경찰서로 도망갔지만, 경찰이 다시 염전주에게 보내거나, 노동청에서 내사만 하다 묻어버려 구출이 늦어진 사건도 있었다. 경찰, 사회복지 공무원, 근로감독관이 소속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법적 책임을 물으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 3년5개월이 걸린 소송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1심 재판부는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경찰이 다시 염전주에게 돌려보낸 1명에 대해서만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또 다른 피해자 3명에 대해서도 국가·지자체 책임을 인정해 2천만~3천만원의 위자료 지급을 선고했다. 이 판결이 2019년 4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되면서, 최 변호사를 비롯한 소송대리인 12명은 정부와 완도군에서 소송비 1200만원을 받았다. 피해자 지원 활동에 참여한 변호사들과 활동가들은 돈을 나누어 갖는 대신 새로운 활동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장애인 노동착취 수사와 가해자에 대한 법원 판결을 모니터링하는 ‘울력과 품앗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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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17일 ‘염전 노예’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 상대로 손배배상 소송을 낸 피해자 8명 가운데 1명에게만 국가가 3천만원을 배상하도록 한 1심 판결에 항소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울력과 품앗이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는.
“염전 노예 사건 이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돼 2017년 학대 예방과 피해자 지원을 하는 중앙·지역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만들어지긴 했다. 옹호기관에선 조사만 하지 수사 권한은 없다. 그렇다보니 변화를 이끄는 데 한계가 있었다. 중앙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2018년 상반기에만 염전 노예 사건과 유사한 피해 사례 27건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중 20건가량은 2014년 이전에 학대가 시작돼 염전 노예 사건이 불거진 이후에도 지속된 경우였다. 염전 노예 사건을 뉴스로 접했을 텐데도 노동착취를 그만두지 않거나 착취를 시작했다는 얘기다.”
최 변호사는 노동착취가 계속되는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형벌의 기능 중 하나는 ‘이런 짓을 하면 안 되는구나’ 경각심을 주는 것인데 이것이 작동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충격적인 학대 사실이 적발됐지만 8천만원만 내면 집행유예가 나오고 민사상 책임도 끝났으니까. (이후에도) 8천만원보다 더 큰 금액을 장애인에게 제대로 줄 이유가 없는 거다. 심각한 학대를 저질렀을 때 처벌과 손해배상 부담이 커야 학대를 예방할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울력과 품앗이 프로젝트’를 통해 수사기관이 장애인 노동착취를 단순 임금체불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장애인복지법 등을 적용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지 감시할 계획이다. 경찰과 검찰, 법원이 장애인 노동착취를 대하는 관점이 바뀌어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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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법무관 시절인 2005년부터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일해온 최정규 변호사는 2012년 이주민이 밀집한 경기도 안산에서 서치원 변호사와 함께 원곡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이주노동자 임금체불 피해 사건에 주력하던 그가 장애인 학대 문제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활동가의 도움 요청으로 염전 노예 사건을 맡으면서다. 2015년에는 (사)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이 하나 더 생겼다. 손해배상을 받고 새 삶을 찾아 떠난 염전 학대 피해자 한 명이 2015년 노숙인이 돼 다시 나타났다.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법률 지원만으론 장애인 학대 문제 해결에 한계를 느끼던 차에 연구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현재 변호사 5명이 함께 일하는 원곡법률사무소 공간 일부는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사무실로 쓰인다. 원곡법률사무소는 연구소가 사용하는 공간 임대료 절반을 기부하고 있다.
2014년 당시 민관 합동조사로 신의도에서만 발견된 염전 학대 피해자가 63명이었다. 최 변호사가 법률 지원을 한 20여 명 외에 나머지 피해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나.
“가장 마음이 무거운 부분이다. 염전에서 구출된 뒤 삶이 이전보다 나아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그분들을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지 알지 못한다. 염전 노예 사건은 가족이 건사하지 못한 장애인을 국가와 사회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가란 장애인이 경제적 학대 위험에 놓이지 않도록 예방하고, 노동착취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면 서둘러 구출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염전주들이 백이면 백 ‘사회와 가족이 버린 장애인을 입혀주고 재워주고 일까지 시키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줬는데 왜 처벌받아야 하느냐’고 당당히 항변하는 이유다. 솜방망이 처벌엔 이런 사회적 배경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시민 신고의 의미
기대한 만큼 사회가 변하지 않더라도, 장애인 학대 문제를 지속해서 알리는 활동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16년 40대 지적장애인 두 명이 각각 19년, 20년 동안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구출된 청주 축사 노예 사건이나 청주 타이어 노예 사건은 시민 신고로 발견했다. 장애인 노동착취에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기에 시민들도 ‘저기서 맨날 일하는 사람은 몸도 불편한 것 같은데 제대로 돈은 받고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을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면 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줘야 하고, 그렇지 못한 현장을 목격했을 때 장애인 학대 신고가 이뤄지도록 인식을 바꾸는 일 역시 중요하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울력과 품앗이’.
힘든 일을 서로 돕는 모습을 일컫는 단어들이 최근 수사기관에선 지적장애인 노동착취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9년 4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해체됐어야 할 ‘염전 노예’ 국가배상 공동대리인단은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 수사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 ‘울력과 품앗이’를 시작합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등 우리나라가 비준한 국제 법규를 살피고 그 기준을 맞춰 수사 절차 개선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지적장애인 노동착취는 지역사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선 제보자가 필요합니다. 노동착취 사건의 부실 수사를 경험하신 분들의 제보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한겨레21>도 ‘현대판 노예 사건’ 근절을 위한 취재 보도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제보 접수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강원 human5364@daum.net,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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