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름은 지주의 재산을 단 한 푼이라도 축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하루아침에 마름의 지위를 잃게 된다. 지주는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름을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 분식회계 수사를 지켜본 한 금융 당국 고위 간부의 촌평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담당한 측근들을, 지주를 대리해 소작권을 관리하는 ‘마름’에 견줘보면, 미래가 탄탄한 삼바가 왜 부실 기업이나 하는 분식회계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바의 분식회계는 오로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게 검찰과 앞서 삼바를 감리했던 금융 당국의 시각이다.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단단하게 다지려면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 지분을 늘리는 게 필수다. 그 일환으로 삼성은 2015년 5월에 삼성전자 지분(4.6%)을 가진 삼성물산과,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제일모직의 합병을 추진했다. 문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보다 훨씬 덩치가 큰 회사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합병 비율을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일모직의 ‘몸값’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제일모직의 자회사인 삼바의 장부상 가치를 부풀렸다는 게 검찰과 금융 당국의 시각이다.
오너의 재산을 축내지 않고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려다보니 탈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2015년 이전까지 적자를 냈던 삼바가 합병을 앞두고 흑자 회사로 둔갑하면서 꼬리가 밟혔다. 무리수는 또 무리수를 낳는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5월 특별감리에 들어갈 무렵 삼성은 대대적인 증거인멸에 나섰다. 삼바 직원들은 공장 바닥을 뜯은 뒤 회계 문건 등 관련 자료가 담긴 노트북과 컴퓨터 서버를 세 군데에 나눠서 파묻은 뒤 덮어버렸다. 이 대담한 증거인멸이 최근 검찰에 의해 들통났고 이를 주도한 실무자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마름의 충성은 삼성에서 낯선 게 아니다. 20여 년 전 이 부회장이 단돈 48억원으로 수백조원에 이르는 삼성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은 삼성의 용의주도함을 과시한 예다. 우여곡절 끝에 기소된 이건희 회장과 그의 ‘마름’들은 대법원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면죄부를 받았다. 마름들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활약이 효과를 본 것이다.
이 부회장도 아버지처럼 마름 덕을 볼 수 있을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이 부회장을 뇌물 혐의로 기소한 박영수 특검팀에서 활약했던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3차장이 지금 삼바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삼바 수사 결과는 이 부회장의 국정 농단 상고심과 파기환송심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블라블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당선
‘이변’ 기사가 이변
이런 이유로 의원들은 1년에 한 번 치르는 원내대표 선거를 반장선거에 빗댔다. 지역구 관리에 유리한 상임위(국토위, 교육위 등)로 사보임(교체)을 제안하면서 물밑으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기본, 서울에서 몇 시간을 차로 달려야 하는 지역구로 예고 없이 해당 의원을 찾아가 지지를 호소하거나, 손편지 이벤트를 벌이고, 국회 내 목욕탕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평소에 밥을 얼마나 같이 먹었는지, 의원 행사에는 얼마나 얼굴을 내비쳤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심지어 “삼수했다”는 것도 호소력을 얻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이인영 의원 쪽이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우세해졌다. 그는 민주당 내 86그룹(80년대 학번, 60년대생)의 대표 격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처음 나섰던 2012년 당시 선거대책위 상임선거대책본부장으로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에 참석한 핵심 인사였다. 이번 선거에 친문 실세가 도왔다는 얘기는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이 의원 개인적으로는 이미 두 번의 당대표 선거 경험이 있다. 스스로도 “체급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압도적인 표차(76 대 49)로 당선됐다. 그런데 이른바 주류 언론은 이번에도 ‘이변’이라는 평가 일색이다. 출입기자들은 이 의원의 당선을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무엇일까.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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