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오전, 지난해 대한항공 조현민 전 전무의 ‘물컵 갑질’ 이후 열렸던 ‘조양호 회장 일가(사진) 퇴진 촉구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카카오톡 대화방에 오랜만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대화방에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이날 열린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된 것을 자축했다. “이제야 회사 다닐 맛이 날 거 같아요. 이상한 조직문화를 바꾸고 합리적으로 회사 운영하면 좋겠습니다”며 새로운 일터에 대한 바람을 말하는 직원도 있었다.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었다. 가족의 갑질과 불법행위로 기업 가치와 주주의 이익을 훼손한 기업 총수를 주주의 힘으로 회사 최고의사결정 기구에서 축출한 첫 사건으로 기록됐다.
조 회장은 270억원대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받고 있고, 조 회장의 배우자인 이명희씨는 운전기사 등을 상습 폭행하고 필리핀 가사도우미를 불법 고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땅콩 회항’의 주인공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은 수천만원 상당의 명품과 생활용품을 밀수입하고 관세를 내지 않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동생 조현민 전 전무도 지난해 ‘물컵 갑질’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렇게 누적된 ‘오너리스크’가 조 회장이 20년 만에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된 주원인이었다.
지난해 7월부터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원칙)에 따라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 주주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이번 대한항공 주주총회(주총)에서 조 회장의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대한항공 주식의 11.7%를 보유한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2대 주주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반대 표결을 권고해 외국인 주주와 소액주주가 반대 의견을 낸 영향도 컸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은 조 회장 연임 저지를 위해 140명의 주주에게서 51만5907주의 위임장을 받아냈다.
하지만 대한항공 쪽은 주총이 끝난 뒤 “조 회장이 사내이사직을 상실했을 뿐 경영권을 박탈당한 게 아니다. 미등기 임원이라도 경영을 할 수 있고, 한진칼 대표이사로서도 경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조 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떼라’는 주총 결의에 사실상 불복 의사를 밝힌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보수언론과 재계는 “연금사회주의가 현실이 됐다”며 우려를 쏟아냈다. 한국경영자총회는 “국민연금 의결권은 기업에 대한 경영 개입이 아니라 국민 노후자금의 수익성과 안정성 확보라는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본질적 역할에 초점을 둬야 한다.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을 흔드는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고 입장문을 냈다. 국민연금 수익률은 높이라면서, 대표이사의 횡령과 각종 ‘오너리스크’로 주주 이익을 훼손하는 일은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니….
조 회장의 연임안이 부결된 이튿날인 28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2018년 감사보고서 ‘한정’ 의견 사태와 관련해, 금융시장에 혼란을 초래한 것에 책임을 지고 모든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 회장과는 상반되는 행보였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조 회장의 연임안 부결과 박 회장 은퇴 선언 이후 한진그룹과 금호아시아나그룹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올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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