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6월12일 오후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채상병특검법)이 긴급상정됐다. 21대에 이은 22대 국회에서도 의회는 여야 간 협의보다 갈등의 장으로, 본연의 역할이 방기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윤석열 탄핵은 내란사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어야 한다. 더 나은 한국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과 방향, 밑그림, 과제 등에 대해 진보적 필자들의 연속 기고를 싣는다. _편집자
인류의 긴 역사 속에 늘 정치가 있었지만 민주정치의 시간은 비교적 짧았다. 민주공화정의 역사가 가장 긴 나라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영국, 미국도 채 300년이 되지 않는다. 그 전의 모든 정치는 지금의 분류로 말하자면 모두 독재였다. 이렇게 보면 수만 년 인류의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는 신생의 실험적인 정치체제다. 아직 민주주의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국가도 많다. 대한민국처럼 비교적 최근 민주화된 국가도 많고, 민주화 이후 다시 권위주의로 회귀한 국가도 적지 않다.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내전으로 빠져든 국가도 많다. 민주주의는 아직 인류의 뼛속에 각인되지 않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중인 정치모델인 것이다.
짧은 역사 속에서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낸 서사는 세계사에 유독 자주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특히 그러하다. 2024년 12월3일 계엄의 밤처럼 위기에 처한 민주공화정을 지켜내는 시민 참여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문제는 매일이 최후가 될 수 없고, 보루로 일상이 지속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대통령 윤석열 구속 결정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2025년 1월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건은 직접적인 시민 참여가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마저 일깨웠다. 이런 일상은 지속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층층이 그리고 켜켜이 쌓인 제도 위에서 지속되는 정치일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민주주의의 일상을 유지하는 제도는 삼부(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을 오묘하게 그리고 공고하게 유지하는 장치들이다. 이 제도들은 기관 간, 정당 간 최대한의 타협이 가능하도록 유연하면서도 절대로 무력화되지 않는 공고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거슬러 민주주의의 일상을 파괴하는 독단적 행동을 막을 수 있도록, 제도들이 이중·삼중으로 구비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제도를 작동하는 사람들은 이 원칙에 맞게 제도를 작동하고 제도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을 거스르고 일상을 침해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권한을 가진 기관은 행정부, 그 가운데서도 행정수반이다. 모든 국가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권한이 행정부와 그 수반에 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더라도 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야당이 아무리 압도적인 의석을 가졌다고 해도, 입법부에는 직접적인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다. 그 때문에 행정수반이 주어진 권한을 남용하는 행동을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억제하는 제도가 쌓여 있고 작동해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제도들이 독단적 행동을 억제하지 못했을 때, 국가와 시민이 치러야 할 물리적,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비용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지난 한 달 반 동안 대한민국이 전세계에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상계엄의 경우,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라 할 수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 극도로 제한되는 결과를 낳는 행위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통령의 결정보다 더 숙의되도록 한 제도들이 겹겹이 마련돼 있었다. 헌법 제77조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시에만 계엄을 발동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군사적인 충돌 상황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급박한 군사적 상황에서도 계엄은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게 되어 있다. 헌법 제82조는 대통령의 모든 국법상의 행위는 문서로 하며, 이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이 부서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대통령의 계엄 선언도 국법상 행위이므로 문서로 의안 제출돼 국무위원들이 심의 후 부서해야 한다. 계엄 선포와 동시에 이는 지체 없이 국회에 통보돼야 하며, 국회는 계엄이 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계엄 해제 요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헌법으로 국회에 부여된 대통령 탄핵권이야말로 이번 계엄과 같은 위법적이고 반헌법적인 대통령의 극단적 조처를 억제하고 방지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즉, 반헌법적 행위를 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파면하라고 만들어진 제도이기 이전에, 대통령이 애초에 반헌법적 행위를 시도하지 못하게 억지하도록 만들어진 제도다. 더욱이 대통령 윤석열은 탄핵당한 전 대통령의 위법을 본인의 손으로 밝힌 특검 검사가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수많은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계엄을 선포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제도적 장치가 무시됐으며, 결국 국회는 제도로 억지되지 못한 대통령을 탄핵소추 했다. 그렇다면 왜 애초에 제도적 안전장치가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사전에 억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도이자 조직은 의회와 정당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야당뿐 아니라 여당의 견제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대통령 윤석열이 속한 여당, 국민의힘은 국회에서 그리고 정당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심지어 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통령이 구속된 이 상황에서도 상당수 구성원이 헌법이 부여한 이 견제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통령 윤석열 당선 직후부터 지속돼왔고, 이 상황에서도 그 관성을 거스르기 쉽지 않아 보인다.
대통령 윤석열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적은 0.73%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이는 역사상 가장 박빙의 선거였다고 할 수 있는 박정희-윤보선 득표율 차(1.5%포인트) 그리고 민주화 이후 김대중-이회창 득표율 차(1.6%포인트)의 반도 안 된다. 그만큼 대통령 윤석열의 지지 기반이 당선 시점부터 이전 대통령에 비해 상당히 좁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당선 직후부터 지지 기반을 넓히려는 노력보다는 극우에 가까운 이념 성향과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며 그나마 있던 지지 기반을 더더욱 깎아가는 행보를 지속했다.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과 행보, 그리고 그에 기반한 인사권 행사와 정책 시행에도, 국민의힘 상당수 정치인은 당내 선거, 혹은 총선에서 개인적 유불리를 계산하며 정당과 입법부의 독립성을 고려하지 않는 충성 경쟁을 지속해왔다. 대통령 윤석열 역시 충성 경쟁에 충실한 의원과 정치인들을 중용하며 이러한 경향을 극화시켰다. 특히 이른바 대통령과 가까운 국회의원들은 행정부를 견제해야 하는 입법부 구성원으로서의 헌법적 의무는 안중에 없고, 대통령의 맹목적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당내의 그리고 입법부 내의 비판적인 의견을 묵살하는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했다. 이러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행정부의 권력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춰야 하는 입법부의 위상 자체를 약화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여당을 무용하게 보이게 하고, 입법부를 정치 투쟁을 위한 공간으로 비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행보가 최소한 정당에는 도움이 됐느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을 지난 총선 결과가 말해준다.

2022년 8월17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시민들이 가스·전기 가격이 급등한 가운데 땔감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벌목 규정을 완화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에서 빅토르 오르반 총리를 풍자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헝가리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지만 극우 성향의 오르반 총리는 친러시아 노선을 걷고 있다. AP 연합뉴스
여당과 입법부가 대통령을 견제하는 최소한의 의무를 방기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가 헝가리와 튀르키예다. 이 두 국가는 민주적으로 당선된 행정부 수반의 권력 남용과 집중으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넘어 권위주의로의 회귀라는 결과로 이어진 최근 사례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피데스(Fidesz, 헝가리 청년 민주주의자 연합) 당이 2010년 총선에서 압승하며 총리가 됐다. 이후 오르반 총리가 권력 집중을 위해 헌법을 수정하고 야당을 탄압하는데, 피데스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사실상 거수기 노릇을 하면서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을 돕는 역할을 했다. 튀르키예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다. 특히 2016년 실패한 쿠데타를 이유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 비상사태가 거의 2년 동안 지속했다. 이 기간에 공직자 숙청과 언론사 폐쇄 등 광범위한 탄압과 권력 집중을 위한 헌법 개정을 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의개발당(AKP)과 입법부는 견제는커녕 사실상 정치적, 입법적 조력자 구실을 했다. 본인들이 속한 정당과 입법부의 권한을 약화하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로의 전환을 앞장서서 돕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오랜 시간 노력과 희생으로 힘겹게 이뤄낸 우리의 민주주의에 이와 비슷한 비극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민주주의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의회정치 복원’이다. 행정수반의 권력 남용이나 위험한 일탈을 견제하고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입법부이기 때문이다. 또 여당과 야당이 일상적으로 만나 정책과 법안을 토의하고 통과시키는 곳 역시 입법부다. 이러한 국회에서의 정치가 복원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일상을 복원하기는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의회정치 복원을 위해 가장 우선돼야 할 한 가지를 꼽는다면 상임위원회에서 정당 간 협상 과정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다수표결 지상주의나 상임위 회의의 전면 거부는 협의의 기초 공간인 상임위의 근본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임위가 정당 갈등의 연장선이 되지 않도록, 상임위에서만큼은 국회의원들 개개인이 전문성과 정책적 입장을 가지고 실질적인 토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당론, 당선 횟수와 같이 당의 운영과 관련한 논리가 상임위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막을 수 없어야 한다. 더 나아가 초당적 협의체든 공동정책을 위한 위원회든 국회 내에 정당 간 협의를 일상화하고 의무화할 수 있는 제도가 다시 활성화돼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제도 강화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지금의 위계적이고 집단적인 거대 양당의 구조에서 위에 언급한 제도 변화 혹은 도입은 현실도 모르는 한가한 소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론과 다른 의사 표현이나 투표를 해당 행위라 비난하고 젊은 정치인들에게 당당히 갑질할 수 있는 수직적 정당 문화와 조직에서는 국회 내의 타협 강화를 위한 제도 변화만으로 정치가 복원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회가 아니면 일상을 회복할 정치는 어디서도 되살아나지 못한다. 국회가 정당 간의 세 과시의 장이 아니라 영혼을 파는 타협을 해서라도 필요한 협의를 하는 곳이 돼야만 일상이 돌아올 수 있다.
대한민국을 군부독재로 돌려놓을 뻔했던 내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라가 내전에 가까워지는 형국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특히 2025년 1월19일 밤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계엄으로 촉발된 지금의 정치적 위기가 민주주의 공고화를 위한 내홍 수준으로 인식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독재와 내전, 둘 다 민주주의의 실패가 낳는 전형적 결과다. 민주주의의 유지 자체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대한민국 국회가 견제와 타협의 제도를 더 켜켜이 쌓고 실행하고 지키는 민주주의 일상의 보루가 되는 것이 절박한 시간이다.
홍지연 미국 미시간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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