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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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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게 자본주의라고?

퇴사 이후가 걱정되는 당신에게 필요한 상상
등록 2019-02-23 14:18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재충전을 위해 사표를 냈다.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일과 사람에 지친 채로 계속 다니는 건 나까지 병들게 할 것 같았다. 쉬면서 여행도 하고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도 만나며 충전하기로 했다. 이달 말까지 출근하는 것으로 정리됐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자 쉬는 기간에 뭘 준비하며 보내야 할지, 다시 직장을 잡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20여 년간 다섯 번 이직했다. 가장 길었던 공백이 3개월이었다. 그런데 그 3개월이 영원처럼 느껴졌고 불안과 자괴감에 딱 미쳐버릴 것 같았다. 퇴직 뒤 한 달도 안 돼 ‘시험 삼아’ 이력서를 넣어본 곳에서 연락이 없자 쉬겠다는 생각은 치우고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수십 곳 중 한 곳에서 연락받고는 일단 다니면서 생각하자며 앞뒤 안 가리고 출근을 했다. 10년쯤 지나 다시 퇴직을 앞두고는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의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쓸모없는 사람이 된 듯한 생각이 문제였다. 우리는 평생 그렇게 배운다. 경제활동을 중심에 놓고 그 외의 모든 활동은 돈을 잘 벌기 위한 전후 맥락에서만 의미를 둔다. 따라서 경제활동이 사라지면 나머지 활동은 무의미한 것이 돼버린다. 휴식이나 늦잠은 재충전이 아닌 게으름이 되고, 내게 주는 선물이던 것들은 불필요한 소비가 된다. 청소와 요리, 대화와 보살핌 등 일상을 유지하고 가족 간 정서적 유대를 만드는 활동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돈을 벌고 있으면 ‘생산에 기여’하는 활동이지만 누구도 돈을 벌지 않은 채 그러고 있다면 근심스러운 ‘집구석’으로 치부한다. 말이 되는가! 그야말로 혹세무민의 논리다. 한데 돈벌이와 연결되지 않으면 다 무의미하다는 이 억지가 너무나 잘 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믿는다.

인구의 절대다수는 자본가가 아니고, 각 개인으로 봐도 일생의 절반 이상을 자본주의와 무관한 활동을 하며 보내는데 이런 게 자본주의사회라고? 여성주의 경제지리학자 깁슨과 그레엄은 그들의 공동 저서 에서 “경제가 명백히 이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가 곧 자본주의가 된 것”이라며, “개인이 일생 동안 더 많은 시간을 비자본주의적 노동에 할애하는 상황에서 그런 경제를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고찰하고 새로운 경제적 상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본은 끝없이 스스로의 배만 불리고 사상 최대 흑자가 나도 일자리 확대는 외면한다. 4차 산업혁명은 자본이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 데 알리바이까지 제공해주고 있다. 고깃집을 운영하는 청년 사장은 TV 인터뷰에서 낙담해 말한다. “우리가 가난하더라고요. 근데 우리 장사도 가난한 사람들이 대상인 거예요. 취업난에 비정규직에 명퇴에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데, 장사가 잘될 수 없죠.”

현실은 이미 다른 상상을 요구하고 있다. 퇴직을 준비하며 경제활동 말고는 엉망이었던 내 생활을 돌아봤다. 상상을 시작했고 습관을 바꿔봤다. 엄청난 성공담을 이어가고 싶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경제활동과 연결되지 않더라도 일상을 건사하는 모든 활동이 의미 있다는 믿음만으로 확실히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잔뜩 예민해져 나와 주변을 괴롭히고 조급했던 과거와 달리 차분하고 너그러울 수 있었다. 내게는 너무나 큰 변화였다.

휴직, 어차피 감내해야 할 시간이라면 불안에 휘둘리는 대신 새로운 상상을 시작해보면 좋겠다. 그 상상이 당신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세상도 바꿀지 모른다.

윤정연 자유기고가

*조직 논리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불편한 분들은 susanghancenter@gmail.com으로 상담 사연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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