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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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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자의 옷은 ‘남자처럼’?

‘여성성을 제거’해야 일이 된다고 착각하는 리더들
등록 2019-03-15 11:07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새로 온 본부장은 여직원들의 외모에 대한 기준이 확고하다. 짧은 머리에 바지, 단화를 권장하고 치마 차림에는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일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가 차림새에서부터 드러난다며 회의 때마다 팀장들의 관리를 당부한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도 모르겠고 팀원들에게 뭐라 전해야 할지도 고민스럽다.”

같은 경험이 있다. ‘치렁치렁 풀어헤친 머리’ ‘다 보이는 치마’ ‘웬 화장들은 그렇게’ 따위의 레퍼토리를 달고 살던 여성 상급자가 있었다. 나중에는 남색 잠바를 한꺼번에 맞춰주고는 회의 때마다 왜 안 입느냐며 성화를 했다. 그는 일하는 성의 기준을 남성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여성도 일하려면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긴 머리나 짧은 치마는 전체 여성의 평가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이런 신념은 그를 거침없게 만들었다.

고백하건대, 나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나 역시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에게 커피 타기나 복사 같은 보조적인 일이 아닌 동등한 업무를 배정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의 조직 논리는 ‘남자처럼’이었다. 여성도 일할 수 있음을 증명하라며 내놓은 조건이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회사의 남자 선배와 동료들을 모방했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그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일했고, 동료나 후배 여직원에게도 그리할 것을 강요했다. 어쩌다 나오는 불만을 틀어막을 방법은 간단했다. ‘여자 망신시키지 마라!’

어떤 사회든 주류의 논리를 따르는 사람은 안전하다. 주류에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 논리를 충실히 따랐던 나는 격려받았고 안전했다. 일정 기간 동안은.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남자가 될 수는 없었으니 나의 유통기한은 애초에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과장 승진? 여자가 무슨 과장…”이라며 해고 통보를 받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뭔가 증명하지 않아도 업무는 당연히 동등하게 배정돼야 하는데 주류의 순한 양이 되어 얻은 안온함에 취해 깨닫지 못하며 지냈던 거다.

‘일하는 여성의 차림’에 대한 상급자의 믿음은 20년 전쯤에서 박제된 것 같았다. 그가 욕망하는 주류도, 편입되고자 택한 방식도 모두 구시대적이었다. 사회가 욕망하도록 구성한 것들에서 독립해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는 인문정신 열풍이 분 게 벌써 언제부터인가! 무엇보다 내게는 여직원들의 차림이 매우 평범해 보였다. 설혹 그렇지 않다 해도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며 팀장 업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제 표현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지내던 어느 날, 얇은 소재의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내게 상급자가 말한다. “옷이 너무 야해. 다 보여.” 나도 정색하고 말했다. “지금 그거 성희롱입니다. 성희롱은 남녀 간에만 성립하는 거 아닙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씀 하시면 정식으로 절차 밟을 겁니다.” 즉각적이고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에게는 막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가 주류의 품에서 벗어나, 일하는 성이 따로 있지 않으며 일하는 여성의 차림 역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길 바랐다.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멈추지 않으면 손해가 갈 거라고 말해야 바뀐다. 그리 말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조금이라도 빨리 바뀔 것이다.

윤정연 자유기고가*조직 논리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 불편한 분들은 susanghancenter@gmail.com으로 상담 사연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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