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생수통 옮기기를 두고 하는 남녀 간 논쟁, 그냥 서로 조금씩 배려할 수는 없는 걸까?”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식당 TV를 보는 중이었다. 커피숍 출입문 안팎에서 남녀가 마주치자 남자가 문을 열어주고 여자가 먼저 나오도록 하는 광고가 나온다. 누군가 “남자 매너 있다” 한마디 한 것이 꼭 여자가 먼저 들고 나게 해야 하느냐는 반론을 부르고, 이렇게 시작된 입씨름은 복사용지나 생수통 같은 무거운 것을 남자만 들라는 법 있느냐며 역차별 논쟁으로 튀어 꽤나 맹렬한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괜히 서먹하다. 그냥 서로 조금씩 배려하면 되는데 사소한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했던 거 아닌가 싶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대화에서 결국 서로 주장하려는 것은 성차별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그런데 성차별 얘기를 하다 말고 뜬금없이 생수통은 왜 등장하는 걸까. 차별 시정 요구를 그저 배려해달라는 투정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차별 시정 요구는 배려가 아닌 권리에 대한 이야기다. 동등하게 보장해야 하는 기본 권리임에도 성별이나 장애, 외모, 나이 등을 이유로 특정한 누군가를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을 차별 행위라고 한다.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사안에 따라 처벌도 가능하다. 얼마 전 공기업 임원이 새 직원 모두를 남자로 뽑기 위해 여자 지원자를 일괄 탈락시켜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를 떠올리면 쉽다.
하지만 배려는 그야말로 개인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다. 당연히 배려받을 권리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 배려해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도 없고 처벌은 더구나 불가능하다.
이렇듯 차별 행위는 마땅히 요구해 시정해야 할 일이지만, 배려는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므로 전혀 별개의 영역이다. 차별은 차별 문제로, 배려는 배려 문제로 틀을 달리해야 제대로 논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산으로 가고, 차별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생수통을 나눠 드는 결론을 내고도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런데 생수통만 따로 떼어 ‘서로’ 배려하자고 결론짓기도 어렵다. 언젠가 선배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냐”고 묻기에 “겸손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네 아이가 되게 잘나갔으면 좋겠다는 뜻이네?”
“네? 제 말이 어디가 그렇게 들려요?”
“야, 겸손하고 배려하려면 일단 잘나가야 할 거 아냐. 안 그러면 누가 겸손하다고 해주냐. 비굴하다고 하지.”
맞다. 배려는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예컨대 빈손인 내가 유모차를 끄는 보호자나 짐을 한 아름 안은 택배 직원을 위해 순서를 양보하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은 배려라 할 수 있다. 교통과 이동에 있어 에스컬레이터나 계단 같은 수단을 수월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강자의 지위가 내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들은 불리한 상황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급한 일이 있으면 나는 그들을 외면하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탈 수도 있다. 배려는 강자인 내 사정에 따라 언제든 회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배려라는 말 속에 숨은 힘의 논리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서로 배려하면 된다는 결론은 약자의 입을 틀어막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배려를 논할 때도 ‘서로’라는 단서를 붙이자면 숙고가 필요하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 차별 문제는 기본권 관점에서 논의하고, 배려는 좀더 여유로운 여건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결론 내면 서먹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대화를 산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배에서 얼른 내려와라. 못 끝낸 보고서를 쓰든가 낮잠을 자든가, 할 거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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