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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다, 나대로 살았다

등록 2018-12-01 17:53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어릴 적엔 온통 가난이 기억난다. 가난해서 생겨나는 일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골목의 사람들이 두 개의 화장실을 같이 써서 아침마다 길게 줄을 선다든가, 누군가 집에서 라디오 방송 를 켜면 여러 집에 걸쳐 들렸던 일들, 그렇게 들었던 전유나의 라는 노래 따위를 기억한다.

물론 노래 제목이나 가수 이름은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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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렌이 울리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엄마

노래가 갑자기 끊기고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던 일도 기억한다. 그날 어머니는 앞으로 오래 화장실에 못 갈 수도 있으니 얼른 다녀오겠다 하고 집을 나갔다. 그때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봐 잔뜩 겁에 질렸던 것도 기억난다.

한때 아버지의 일이 번창해 2층짜리 집의 한 층을 나 혼자 쓴 적도 있었는데 그 시절은 기억이 아니라 어딘지 불분명하고 텅 빈 기분으로 남아 있다. 열몇 살 아이의 물건이랄 것이 많지 않을 것이고, 내가 쓰던 2층에는 집 안에서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올라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쩐지 남의 집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지냈던 것 같다.

2층 거실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있어 방과후에 함께 온 친구들과 동그랗게 둘러앉아 간식을 먹곤 했다. 나는 그런 오후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친구들이 와 있을 때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 몇 시간을 보냈다. 발소리가 쿵쿵 울리거나 말소리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어머니께 불려갔기 때문이다. 조용히 걸어다니라고 말해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친구들에게 그 말을 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친구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든가 기분은 나로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상당 부분 어른이 전해준 것이기도 하다. 그 어른은 어쨌거나 내게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부모일 경우가 많다. 성인이 돼 독립하기 전까지 날마다 부모의 기분이 내게 전해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살았다. 그리고 부모의 기분은 곧 나의 기분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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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집에 살았던 몇 년을 제외하고 대체로 가난했던 나는 가난해서 혼자 있었다. 어머니는 밖에서 일하거나 교회에 가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 혼자인 나는 타인의 기분에 짓눌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도망치듯 떠나온 이층집에서 전리품처럼 가져온 고급 전축으로 엘피(LP)를 들으며 혜원출판사의 혜원세계문학 시리즈를 읽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책을 사서 읽을 수는 없었고 나는 가지고 있던 몇 권의 책을 번갈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그러다 새로운 책이 너무 읽고 싶을 때는 서점에 가 한참 서서 읽다 돌아왔다.

음반을 걸고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문제집은 누군가 풀었던 것들이 내 책상 위에 놓여 있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교회에서 가져온 것들이 아닌가 싶다.- 칸에 적힌 답들을 지우는 것으로 문제집 풀이를 시작했다. 시험도 곧잘 봤다. 학부모 면담에 부모님을 데려오지 않아서 담임에게 맞았던 것도 기억난다. 데려올 때까지 때리겠다고 해서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 맞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나대로 살았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와 숙제를 하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꺼내 먹고 전축에 음반을 걸고 마침내 흔들의자에 앉아 (흔들의자 역시 전리품 중 하나였다) 책을 읽는 시간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시절은 가난이라든가 불행이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음악이 흘러나오던 작은 방과 책들만이 내 것이라는 풍요로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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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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