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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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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돌이를 그릴 때 너는 매를 맞았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의 기록 <살아남은 아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등록 2018-09-11 13:30 수정 2020-05-03 04:29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 피해자 노숙 농성 303일째를 맞은 9월5일, 국회 앞 농성장에 생존자가 만든 조각보가 전시돼 있다. 전정윤 기자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 피해자 노숙 농성 303일째를 맞은 9월5일, 국회 앞 농성장에 생존자가 만든 조각보가 전시돼 있다. 전정윤 기자

한종선씨와 나는 동갑내기다. 8살 종선씨가 부산 형제복지원에 끌려갈 때 찍은 입소 카드에는 그의 생일이 없다. ‘1975년 이하 미상’(실제론 1976년생), 소년의 사진 아래에 숫자가 쓰여 있다. 84-10-3618. 그는 ‘부랑인’ 강제수용소 형제복지원에서 3년을 살았다. 그가 전규찬, 박래군과 함께 쓴 책 는 생존기다. 이 생존기 앞에 알맞은 형용사를 대한민국에서 ‘국민’으로 산 나는 떠올릴 수가 없다.

분리수거된 사람들

종선씨의 아버지는 구두닦이였다. 그는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 세 살 터울 누나가 라면 끓여주고 글씨 가르쳐줬다. 종선씨는 학교 앞에서 파는 ‘달고나’를 좋아했다. 누나는 종선씨에게 줄 달고나를 만들려고 설탕을 녹이다 발등을 데었다.

1984년 10월16일 아버지는 누나와 종선씨에게 새 옷을 입혀 동네 파출소에 데려갔다. 조금 있다 오겠다 했다. 아버지가 아니라 검은색 지프차가 왔다. 몽둥이를 찬 사람들이 오누이를 차에 실었다. 종선씨가 울자 따귀를 때렸다. 그의 키는 111㎝였다. 복지원에서 누나는 23소대로, 종선씨는 24소대로 보내졌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쥐어뜯겨 땜통이 생겼다. 감색 추리닝과 검정 고무신을 줬다. 한 소대는 120여 명, 소대장, 중대장, 그리고 원장이 통제했다.

소년은 새벽 4시에 기상한다. 조장들이 물을 세 번 붓는 새 소금으로 이를 닦는다. 구보가 끝나면 3500여 명이 밥을 먹는다. 5분 안에 먹는다. 선착순 몇 명 안에 들지 못하면 매타작이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 지네를 잡아먹기도 한다.

겨울, 그가 추리닝 소매를 길게 빼 손을 가렸다. 지나가던 원장이 봤다. “소대장 누구야!” ‘이불말이’, 담요로 둘둘 말고 팬다. 잘못 맞으면 머리가 깨진다. ‘히로시마’, 물구나무 서서 맞는다. ‘나룻배’, 머리와 발꿈치를 15㎝ 높이로 든 채 맞는다. ‘전깃줄’, 두 발을 벌리고 어깨 너머로 두 손을 넘겨 벽을 짚은 채 맞는다. 매일 맞는다.

겨울, 빨래하는 날, 9살 종선씨와 또래 아이들은 빨래 보자기 위에서 잠깐 뛰어 놀았다. 조장이 봤다. 종선씨는 발가벗겨진 채 손발이 묶였다. 조장은 찬물을 부었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살려주세요.” 또 다른, 비슷한, 어느 날, 조장 기분이 안 좋다. ‘타작’이 시작됐다. 기합받던 한 원생이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조장은 더 짜증이 나 그를 밟았다. ‘퍽.’ 소년은 그 간질 환자의 풀린 눈을 보았다. 그 원생은 소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복지원 안에 있는 교회 옆에 무덤이 늘어갔다. 어느 일요일, 9살 종선씨는 성폭행 당했다.

누나, 동생을 보러 왔다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네 누나 따먹혔다며?” 8살 종선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네 누나 미친년 다 됐다.” 누나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상자를 감금한 신관으로 갔다고들 했다. 종선씨는 창문에 매달려 누나가 있는 정신병동 쪽을 봤다. 누나는 몸에 손이 묶인 채 누워 있다. 소년이 10살이 된 해, 아버지까지 형제복지원에 끌려왔고 그곳에서 정신이상자가 됐다.

사회 정화의 치적

1987년 11살 종선씨는 형제복지원을 벗어났다. 그해 원장 박인근이 원생들을 동원해 자기 땅에 목장과 운전교습소를 지었다. 축사에 가두고 중노동을 시켰다. 한 명이 맞아 죽었다. 김용원 검사가 수사를 시작했다. 복지원은 폐쇄됐다. 종선씨는 서울 소년의 집으로 보내졌다. 아버지와 누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형제복지원에 갇혀 있던 3500여 명 중 성인 대다수, 땡전 한 푼 없이 거리로 내몰렸다. 거리에서 죽었다. 몇 명? 알 수 없다.

누나와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10년이 넘어 알았다. 구두공장에 취직했는데 사장은 주민등록증이 없던 종선씨 임금을 떼먹었다. 임금 달라고 하니 “경찰에 신고해 복지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배달, 막노동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공사판에서 허리를 다쳤다. 산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러 동사무소에 간 날, 누나와 아버지 소식을 알게 됐다. 정신병원에 있다고 했다.

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 생각했다. 언제부터 잘못됐나. 2012년 뙤약볕 아래,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벌였다. 모두 지나쳤다. “87년이었다면 복지원으로 끌려왔을 행색”을 한 한 사람, 국회에 세미나 때문에 온 전규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그의 앞에 서 멈췄다. 이야기를 들었다. 종선씨는 그 순간 “분노 대신에 희망이라는 것이 내 가슴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썼다.

종선씨가 태어나기 바로 전 해, 1975년 12월15일, 내무부 훈령 410호가 발표됐다.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사무 처리 지침.’ 12년간 500명이 넘게 숨진 형제복지원의 박인근 원장은 이 훈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불법감금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국고보조금 횡령 등만 인정됐다. 재판을 거치며 횡령 액수도 애초 11억원에서 6억원으로 대폭 깎여 2년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다. 여전히 수백억대 재산가인 그는 다시 형제재단 이사가 됐다. 이후 재단 이사장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관광객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대규모 단속을 벌였다. ‘국민의 안녕’을 위한 ‘정화사업’은 치적이었다. 종선씨 가족은 그때 ‘단속’당했다. 폭력과 감금은 형제복지원으로 끝났나? 1997년 에바다복지회 사건, 2004년 청암재단 사건, 2006년 성람재단 사건, 2011년 인화학교 사건….

나도 종선씨처럼 8살 때 달고나를 좋아했다. 나는 국민이었고, 그는 비국민이었다. 가르는 기준은, 운이었다. 나는 운 좋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수용소에서 맞을 때, 나는 아파트에 살았다. 86년 아시안게임 때는 호돌이를 그렸다. 그해 공익광고에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어린이가 들판을 달렸다. “우리의 땀과 정성이 결실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서로 믿고 돕는 화합,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가는 민족 저력.”

종선씨는 이렇게 썼다. “그 당시 부산 지역에 거지나 장애인, 노숙자가 사라져 부산 지역이 깨끗해졌다며 좋아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서울역 앞을 지날 때 노숙인들을 보면 고개를 돌리고 가는 나도 그랬을 것이다. 장애인들이 탈시설을 외치며 시위할 때면, 속으로 되물었다. ‘어디로 갈 수 있지?’ 그래서, 종선씨가 쓴 책 의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이다.

우리의 공모

종선씨의 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다. “누나, 집에 가자.”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300일 넘게 농성 중이다. 국가는 사죄할까? 형제복지원뿐일까? 1986년 말만 따져도 ‘부랑인’ 시설 36개소에 1만6천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마흔을 넘어 방황 중이라는 나, 그토록 사치스럽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에게 욕지기가 올라온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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