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등병의 엄마’를 도와주세요

군 의문사 유족들과 함께 연극 만드는 인권운동가 고상만
등록 2016-12-29 18:19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1999년 1월 국방부 후문. 펼침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전투 손실 예방의 달’. 비전투 손실은 전투 손실과 반대되는 개념. 군에서 발생하는 인명이나 물품의 손실 따위를 가리킨다. 펼침막을 본 고상만씨는 충격을 받았다. 전투와 무관하게 죽은 군인 또한 비전투 손실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 인간의 죽음을 ‘손실’이라는 사물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비정한 현실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군은 여전히 이 용어를 사용한다. “훈련소는 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병 교육기관인 만큼 혹서기에 발생 가능한 안전사고 유형을 사전 확인해 조치하는 등 비전투 손실을 예방하고….”

군 의문사. 군인이 군대에서 죽었는데 사망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군인의 부모와 가족은 어떤 심정일까. 더구나 자살로 처리되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이나 명예 회복조차 불가능하다면 어찌해야 하나. “저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라고 통곡하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1948년 국군 창설 뒤 지금까지 복무 중 사망한 군인은 4만 명 어름. 한 해 평균 거의 600명꼴. 지금도 1년에 150명 안팎이 군복무 중 숨진다. 이들 가운데 100명가량은 자살로 처리된다.

국군병원 냉동고를 떠나지 못하는 주검

2016년 9월 기준, 군인 주검 12구는 국군병원 냉동고에 있다. 17년째 냉동고를 떠나지 못하는 주검도 있다. 군의 사고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가족들이 장례를 거부하기 때문. 대표적 군 의문사인 ‘허원근 일병 사건’은 사건 발생 31년 만에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황망한 결론. 군 당국의 초기 현장조사가 부실했던 탓이다(제1080호 사회 ‘외면당한 31년… 허원근법이라도 살려라’ 참조).

2006~2009년 한시적으로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운영됐다. 접수된 600건 진정 가운데 진상 규명 결정은 246건. 절반에도 못 미친다. 군의문사위에서 ‘순직’으로 군에 통지한 것은 162건. 실제 군에서 재심의를 거쳐 인정한 것은 40건에 불과하다.

군에서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사연을 담은 연극이 만들어진다. . 2017년 5월 무대에 올릴 참이다. 연극을 기획한 이는 인권운동가 고상만(46). 12월21일 저녁 경기도 고양에서 그를 만났다. 세밑 동지, 겨울비 쏟아지는 거리. 자동차가 연신 물방울을 튀겼다. 우리나라에서 군 의문사 유가족들의 눈물방울을 가장 많이 본 사람, 바로 고상만이다.

고씨가 인권운동에 나선 것은 1992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으면서다. 이후 1998~99년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일했다. 이때 군 의문사 진상 규명 활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을 조사했다. 2002년부터 2년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군 의문사 조사관으로 활동. 특히 1960~70년대 민주화운동가 장준하(1918~75) 선생의 의문사 사건을 집중 조사했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가장 깊이 파헤쳐온 이가 그다. 근래에는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실(19대 국회)에서 일했다.

연극 대본도 고씨가 직접 썼다. A4용지 17장 분량.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1998년 1월 입대한 ㄱ 일병은 부대 안에서 선임병들의 상습 구타와 가혹 행위를 지휘관에게 보고했다. 당일 오후 지하 보일러실에 내려간 ㄱ 일병을 선임병이 전기 배전반에 감전시켜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사건 직후 군은 사건을 ㄱ 일병의 자살로 둔갑시켜 유가족에게 알림으로써 은폐하려 했다. 유가족들의 목숨 건 진상 규명 투쟁 끝에 타살로 진실이 밝혀졌고 ㄱ 일병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입대 6개월 만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들, 3대 독자였고 입대 직전 손자를 부모에게 안겼던 아들은 끝내 살릴 수 없었다.

연극의 절정은 후반부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 국방부 앞에 관 3개를 놓고 단식투쟁을 하는 어머니 앞에 ‘죽은 아들’이 나타난다.


“엄마, 배가 고파요.”
이 말에 허둥지둥 주변을 돌아보는 엄마. 하지만 단식농성장에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우 엄마, 갑자기 앞가슴을 풀어헤친다.
“영우야, 이리 와. 대신 엄마 젖을 먹고 가렴. 엄마가 젖을 줄게.”엄마 젖을 먹고 가렴
2000년 10월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전국군폭력희생자유가족협회’ 회원들이 군에서 의문사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삭발한 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00년 10월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전국군폭력희생자유가족협회’ 회원들이 군에서 의문사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삭발한 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연극 맨 마지막 장면에 아이가 ‘배가 고프다’며 괴로워한다. 부모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게 있다.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못해준 것. ‘내 젖을 먹으라’는 장면은 아이가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는 걸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연극 연출은 배우 맹봉학(53)씨. 영화·TV·연극에 꾸준히 출연해온 맹씨는 드라마 (2005)에서 삼순이 아버지 역으로 유명하다. 사회적 발언과 활동도 거침없다. 그는 2012년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의 집회에 참여했다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입건돼 2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지난 11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된 문화예술인들의 캠핑촌 밤샘투쟁에도 참여했다. 맹씨는 연극에 참여한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군에서 어쩔 수 없이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명예 회복을 돕고 국립묘지에 안장해주어야 하지 않나. 심신이 나약해서 자살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옳지 않다. 이번 연극은 완성도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아픔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사회에서 내 영역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같이 싸워야 한다고 본다. 배우니까 일반인보다는 인지도가 있어서 1%라도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배우, 연예인이란 직업은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고 세상을 올곧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극 음악감독은 미디어협동조합 국민라디오 임대웅 피디가 맡는다. 지난 10월 첫 모임을 했고 유가족 60여 명이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연극은 모두 여섯 차례 열릴 참이고, 1월 초 유가족들과 고씨를 비롯한 ‘스태프’들이 상견례를 한다. 연극 제작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의 기대도 크다. ‘군 사상자 유가족 연대’(군사연) 이정호(66) 회장은 기자에게 말했다.

“국방부가 벽이 두텁다고 해서인지 시민운동이나 인권운동 활동가들도 군 의문사 문제에 잘 나서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도 고쳐야 할 문제가 많다. 이렇게 신경 써주니 엄청 고마울 뿐이다. 나는 연극에 직접 출연하지는 않고 뒤에서 도울 생각이다. 아이를 잃은 지 16년이 지났지만, 분한 걸 어떻게 풀 수가 없다. 말할 수가 없다. 아들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증오스럽다.”

자식 잃은 부모는 죄인이 아니다
2013년 5월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 의문사 유족이 외치는 국회·국민 호소 대회’ 도중 한 유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5월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 의문사 유족이 외치는 국회·국민 호소 대회’ 도중 한 유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고씨가 연극 제작에 뛰어든 이유 또한 이 회장과 다르지 않다. 국가가 징병할 권리만 내세우고 정작 사고가 나면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 여전히 한 해 평균 100명 넘는 젊은이들이 군에서 ‘자살로 처리’되는 상황.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과 자책 앞에서 풍비박산이 되는 집안. ‘사망 위로금’ 1500만원 내던지고 모든 책임을 다했다는 투로 일관하는 군. 그가 분노하는 지점이다.

연극 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이 무대에서 자신들의 슬픔을 드러냄으로써 심리적 치유를 돕고, 억장 무너지는 가슴에 한 줄기 숨구멍을 내기 위해서 기획됐다. 내처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기 위한 동력으로도 삼을 참이다. 관련 법률 제정을 위한 국민 공감대도 이루려 한다.

고씨와 함께 일한 김광진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한 법률 2개는 회기 만료로 폐기된 상태.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과 ‘의무복무 중 사망 군인의 예우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군복무 중 발생한 사망사고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는 한편 국가가 사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예우·지원에 나서도록 하는 게 두 법안의 뼈대다. 고씨는 이 법안들이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고 했다.

“이 연극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군인이 죽은 게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다. 한 해에 3천~4천 명씩 사망했다. 사망자가 급격하게 줄어든 계기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그냥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잘못된 것을 바꿔야 한다고 치열하게 싸워준 덕분에 세상이 바뀌어왔다고 믿는다.

군인들이 죽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통해서 군이 바뀌어야 한다는 캠페인을 하고 싶다. 연극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계기다. 군인들이 죽지 않도록 만들고, 만약 죽게 되더라도 국가가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

유가족들이 제일 소원하는 게 있다.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공정하고 투명하게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뒤 2009년 예산 낭비라며 군의문사위를 폐지했다. 이 연극의 핵심에는 군의문사위를 다시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있다. 5월 연극 공연을 앞두고 유족들이 직접 대통령선거 후보 캠프에 초청장을 보내려고 한다. 차기 대통령이 될 분이 이 연극을 꼭 보셨으면 좋겠다.”

고씨와 유가족들의 소망과 달리 군의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7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당시 한 장관의 ‘작은 것’ 운운하는 발언은 이랬다. “우리 군이 64만의 병력이 들어와서 복무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그중에서 의원님이 말씀하신 그런 안타까운 사건·사고도 있지만 많은 장병들은 또 굉장히 보람을 느끼면서 인격이나 인권이 보장된 가운데서 근무하고 있는 것도 또한 현실입니다. (…) 그래서 그런 작은 것을 가지고 전체를 문제시하는 그런 것들은….”

연극 이등병의 엄마 표를 사주세요

고씨는 12월1일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연극 제작에 필요한 비용 7천만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스토리펀딩 ‘연극 이등병의 엄마 표를 사주세요’(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0265). 고씨는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다고 했다.

“군에 보낸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죄인이 아니다. 국가의 예우를 받아야 할 애국자 아닌가. 정말 부모는 아무 죄가 없다. 그 부모를 예우해주지는 못할망정 국가는 ‘못난 네 자식’이라며 부모에게 모욕감을 주고 있다.”

고양=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