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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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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근] 풍랑과 구토, 그리고 월척!

등록 2002-01-10 00:00 수정 2020-05-03 04:22

낚시 왕초보 신승근 기자, 추자도 갯바위에서 펼친 바다와의 1대1 승부

“바다낚시 좋아하는 사람 없냐, 새해 분위기에 맞게 시원한 제주 밤바다에서…. 기자체험 해볼 사람? ” 뱀띠 해가 막바지로 치닫던 2001년 12월29일 편집장이 불쑥 얘길 꺼냈다. 전날 독자편집위원회에서 이준상 편집위원이 바다낚시의 매력과 낚시문화의 문제점을 기사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낸 데 공감한 듯했다. 마감에 쫓기던 기자들이 머뭇머뭇하는 사이 편집장은 나를 지목하듯 말했다. “신승근, 여의도에는 3할만 투자해라. 당신이 쓴 역술인, 카지노 체험, 그런 기사들이 훨씬 반응이 좋더라.” 정치팀 소속인 나에게 다른 분야 기사의 추가생산을 주문한 것이다. 막가는 정치권과 정치기사가 도맷금으로 욕먹는 현실에 고민하던 나 자신 가끔 여의도 탈출을 꿈꿔왔다.

삼삼한 붕어낚시의 추억

하지만 고민이 앞섰다. 한때는 시간만 나면 방죽과 냇가에 나앉았다. 낚시도구를 살 형편이 안 됐던 70년대 후반, 대나무 장대에 공사장에서 찾아낸 흰색 시멘트포대 봉합용 실을 묶어 낚싯대를 드리우곤 했다. 손바닥 서너배 크기의 붕어가 거의 손 안에 들어오려는 순간 물에 잔뜩 부푼 봉합용 실이 맥없이 끊겨나간 기억은 아직 삼삼하다. 하지만 취직하고 일상이 퍽퍽해지면서 물고기의 입질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에서 희열보다는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낚싯대를 접은 지 7년은 족히 넘었다.

그런데 바다낚시라. 서울의 수은주가 영하 10℃ 이하로 내리꽂히고, 제주도 인근 추자도의 풍랑도 심상치 않다는 정보였다. ‘생고생하는 게 아닐까.’ 선뜻 나서는 자원자가 없었다. 며칠 전 송년회 때 “내년부터는 신상필벌을 철저히 하겠다”고 강조하던 편집장 모습도 오버랩됐다. 나는 결국 자원했다. 제주도에 대한 색다른 환상으로 기대를 몰고 갔다. 36살이 될 때까지 그 좋다는 곳에 발조차 디뎌보지 못한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라고 합리화했다.

출조를 결심한 뒤 원인 제공자인 이준상 독자편집위원에게 전화했다. 아무 장비도 없는 나는 그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장비 일체를 무상 대여받기로 약속한 뒤 인터넷 서핑에 나섰다. 출조 예정지인 추자도에 관한 정보와 바다낚시 기초이론 습득이 1차 목표. 그러나 곧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가장 알고 싶은 복장과 장비 이용법, 또 무엇을 낚아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감성돔 낚는 법, 조류 읽는 법…. 초보자에게는 너무 전문적이었다. 결국 5시간 이상 헤매던 나는 전문 낚시꾼들의 희열과 애환이 담긴 감상문 몇건만 챙긴 채 물러섰다. “무작정 부닥쳐보자.”

이런 고민을 알 리 없는 동료기자들. “바다낚시, 참 좋겠어.”, “뭘 쓰겠다는 거야”, “그런 것도 기자가 뛰어든 세상이 되나” 뭐 이런 반응이었다. 밤새 거센 바닷바람에 맞서야 할 나는 필사적이었다. 옷장 뒤엎어 쳐다보지도 않던 옷가지를 모두 끄집어냈다. 고심 끝에 눈비올 때 입는 방수용 등산 바지와 2000년 겨울 임신중인 아내가 톡톡히 보온효과를 봤다는 임부용 롱코트를 최종 선택했다. 방수용 등산바지에 임부용 보온코트를 걸치고 바다낚시 나서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를 찍다

1월3일, 새벽 4시30분에 몸을 일으킨 나는 사진부 이용호 기자와 함께 제주행 첫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추자도행 첫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제주에서 이준상 독자편집위원과 만나 바다낚시와 추자도 전반을 특강받았다.

“추자도는 동양 최고의 바다낚시터예요. 일본이나 동남아에서까지 찾아와요. 모든 조사(釣師)들이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바다낚시의 ‘메카’죠. 낚시의 손맛과 고기맛이 최고인 감성돔이 나오는 요즘 같은 겨울에는 더 많이 몰려요.” 그 또한 추자도는 처음이었다. 비용과 시간, 풍랑 등을 고려할 때 쉽게 찾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첫배인 9시30분발 컨티넨탈호, 1시간 만에 추자도에 이르는 쾌속선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승객들 상당수가 의자를 놔둔 채 바닥에 무작정 드러눕는 게 아닌가.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야.’ 낮선 풍경에 당황하고 있을 때, 안내방송이 흘렀다. “해상에 파고가 높아 선체요동이 심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여”…. 이어 승객들에게 검은 비닐봉투 몇장이 지급됐다. 평소 멀미가 심하다는 이용호 기자는 “카메라, 당신이 지고 가야 할지도 몰라”라고 불길한 예고를 했다. 항구를 벗어나면서 배는 곧 놀이동산 청룡열차로 변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높은 파도를 타고 높이 치솟았다 내려앉으며 요동친다. 곧 먼바다로 나서자 배행과 추락을 반복했다. 높은 파고를 타고 공중으로 한참 치솟는가 싶더니 몇초 뒤 다시 철렁 내려앉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비닐봉투로 얼굴을 감싸는 승객들이 목격됐다. 아예 쓰레기통을 움켜쥔 채 얼굴을 깊숙이 들이밀고 구토를 거듭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제공된 비닐봉투를 모두 써버린 이용호 기자는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도착시간 10여분을 남겨둔 시간, 나도 끊임없이 영화 의 여주인공 전지현의 행태를 재연하고 있었다. 술취한 그녀가 전철 안에서 입안 가득 넘어온 구토물을 다시 뱃속으로 되넘기듯.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 힘겹게 추자도에 발을 디뎠다.

낚시꾼을 실어나르는 민박집 트럭과 차디찬 갯바람에 아랑곳않고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커피를 들고다니는 여인들이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섬사람들은 “대개 뭍에서 빚지고 흘러든 티켓다방 종업원들”이라고 설명했다.

찬바람 맞으며 10여분 기다리자 예약한 민박집 차량이 나타났다. 젊은 트럭 운전사가 짙은 경상도 억양으로 물었다. “첨입니까. 얼마나 있을 낀데요.” “내일 오후 늦게 뜨겠다”고 답했다. “내일 오후는 배 못 뜬다 아입니꺼. 풍속 12∼16m면 주의보라예. 064-131로 전화해 일기예보 들어보소. 내일 오전까지는 괜찮으니 그 전에 뜨소. 안 그라면 사나흘 발이 묶입니더.” 긴장했다.

추자도에서 민박업 종사자의 말은 절대적이다. 숙식제공과 날씨정보, 배를 이용해 본섬 주변 작은 갯바위로 이동시키는 것은 기본이다. 섬 구석구석 입질좋은 포인트까지 날라주고 수심과 수온, 물밑 조류의 흐름은 물론 적합한 낚싯줄 길이나 찌의 무게까지 일러준다. 낚시의 성패가 선택한 민박집에 달렸다는 게 헛말이 아니었다.

애꿎은 낚싯바늘 2개를 수장하고…

민박집에 들어서자 10여명의 꾼들이 북적였다. 닷새 이상 머물다가 오후 배로 떠날 사람들이었다. 날씨가 심상찮다는 예보 탓에 우리 일행을 비롯해 5명이 머물고 있었다.

점심을 먹으며 주요 포인트와 수심 등 기본정보를 취득했다. 정보를 준 다도민박 대표 이만호씨. 부산 출신인 그 역시 한때 전국에 이름을 날린 전문 낚시꾼이었단다. 전국에서 제일 큰 돌돔을 잡았고, 낚시 전문지 필자와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자그만 민박집 주인이다. “지난 27년 동안 감성돔이 낚이기 시작하는 11월에 추자도에 들어오면 다음해 4월까지 진을 쳤지. 1년에 한 8개월은 전국 갯바위에 나앉았다 아입니꺼. 그러다 차라리 추자도에 들어가자 싶었지예.” 지난 97년 결국 부인과 함께 추자도에 정착했다.

낚시에 생을 건 이씨야 그렇지만 섬까지 온 부인 속마음은 오죽할까. 낚시를 가정파괴 원흉으로 지목하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어온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씨는 “거 다 옛날 얘기라예. 요즘은 아예 부부 조사들도 많다니까. 아까 안 봤심니꺼. 꼭 낚시가 아니라, 어떤 취미라도 깊이 빠지면 다 마찬가지라예.” 자신을 다도 아주메로 부르는 이씨 부인은 “말린다고 됩니꺼. 이제는 포기했지예”라며 말을 꺼냈다. “솔직히 여기가 좀 답답하지예. 하지만 우야겠소. 부산 살 때는 적이었는데…. 이제는 한배 탄 동지라예.”

첫 도전에 나선 것은 바닷물이 한창 들어오는 오후 1시께. 조류가 요동치며 바다 밑바닥을 훑고 지나면서 부유물들을 끌어 올리면서 이를 먹는 고기들이 몰린다는 설명이다. 포인트는 북제주군 추자면 묵리 앞 가파른 바위턱, 이른바 ‘25시 포인트’. 일본의 전문 낚시꾼들이 하루 24시간 낚시를 해도 질리지 않는 곳이라며 붙인 애칭이다.

포인트에 내려선 나는 조력 7년인 이준상씨로부터 릴 낚싯대 사용법, 낚싯줄 던지는 법, 찌 다는 법, 고기의 입질이 있을 때 낚아채는 법 등 실전교육을 받았다. 감성돔이 즐긴다는 새우를 미끼로 끼웠다. 그리고 가르침대로 찌와 낚싯대 끝선의 거리를 1m 정도 남겨둔 뒤 몰아치는 파도를 향해 힘있게 대를 휘둘렀다. 찌의 무게로 인한 원심력으로 최대한 바다 멀리 보내는 게 1차 목표였다. 하지만 찌는 내 발끝 2m 지점에 맥없이 자꾸 내려앉았다. 얼굴이 붉어졌다. “초보는 다 그렇다”는 위안이 계속됐지만 차디찬 갯바람에도 얼굴은 후끈거렸다. 어쩌다 한번 좀 멀리 나갔다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다 속 무언가에 바늘이 걸렸다. 수심을 잘못 예측한 탓이다. 결국 30여분 동안 낚싯바늘 2개를 수장시키는 수모를 겪은 뒤 낚시를 드리울 수 있었다. 이제 일렁이는 파도를 타고 넘는 연분홍색 찌가 물 속 깊이 빨려들기를 학수고대했다. ‘제발 큰 놈 한 마리만 물어라. 제발….’ 그러나 찌는 무심하고 거친 파도 위를 유영할 뿐, 감감무소식. 상념은 깊어갔다. ‘장비 하나 없이 독자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왜 이 짓을 해야 되지. 한 마리도 못 잡으면 기사는 어떻게 쓸까. 바람이 거세져 섬에 발이 묶이면 기사 쓰기 훨씬 편할 텐데….’ “놀며 기사 쓴다”는 반응을 보인 몇 사람의 얼굴도 떠올랐다.

출조 3시간 만에 4마리를 낚다

40분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찬바람에 곱고 저려오던 손끝에 묵직함이 느껴졌다. 순간 먼 곳 무인도를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황급히 찌를 찾았다. 물 속으로 사라졌다. ‘뭔가 걸렸나보군.’ 무작정 낚아챘다. 낚싯대 끝이 완전히 휘었고, 손끝에는 더욱 팽팽한 장력이 느껴졌다. 이씨는 “일단 릴을 계속 감아요. 그런 뒤 살짝 들어올려봐요”라고 소리쳤다. 20여초 뒤 낚싯줄 끝에 걸린 놈이 표면 위로 솟구쳤다. 힘좋고 잡기 어렵다는 감성돔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제법 컸다. 다 잡은 것을 놓칠까 싶어 맘을 졸이며 1분 이상 서툰 줄감기를 계속한 끝에 뜰채로 건져올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꽤 큰데요. 용왕님이 기자가 체험온 줄 아나. 어떤 조사는 일주일씩 있어도 한번 낚아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첫 고기가 감성돔 월척이네.” 이씨가 기를 살려줬다.

감성돔을 노리는 전문 낚시꾼조차 감성돔 월척 낚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기예가 뛰어나야 열번 출조해 3번 정도 낚을 수 있다는 뜻에서 “꿈의 3할대”라는 말도 있단다. 일진이 좋았다. 곧바로 감성돔과 너무 흡사해 서울 사람들은 감성돔으로 착각한다는 ‘민상어’, 이른바 ‘서울감성어’가 올라왔다. 출조 3시간 만에 나는 학꽁치, 놀래미까지 모두 4마리를 낚았다. 곧 민박집 트럭이 나타났다. “이미 물이 들어 더이상 낚시는 의미가 없다”면서 철수를 권고했다. 사람도 식사 때가 있듯 물고기도 때가 지나면 더이상 입질을 않는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민박집에 돌아온 나는 잔뜩 기가 살았다. “진짜 실력있나베. 요즘같이 조황이 안 좋은 때 39짜리를 한번 출조로 낚고.” “이제 그만 나가소. 그러면 환상의 10할 타율 아닌교.” 민박집 주인은 즉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 일일조황 코너에 올리려는 것. 이곳에서 알았지만 낚시꾼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인터넷이 활성화된 분야였다. 이렇게 일일조황을 올리면 하루 1천여명의 조사들이 클릭한 뒤 상당수가 직접 출조에 나선다. 때문에 일부 사이트의 경우 어부에게 사들인 월척으로 조황실적을 속이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나 교만은 금물. 다른 두명의 전문 조사가 들이닥치자 내 성과는 작아졌다. 낚시에 빠져 추자도를 드나들다 조립식 창고를 짓는 일을 발주받아 당분간 추자에 눌러앉은 김기수(35)·문진수(35)씨. 이들은 나와 약 100m쯤 떨어진 포인트에서 42∼44cm짜리 월척을 3마리나 낚았다. “작은 칭송에 교만하지 말고, 잘 나갈 때 겸손한 마음을 더 깊게 유지하라”는 가르침이 순간 내 뒷머리를 내리쳤다.

“한뼘 이하 물고기는 무조건 놓아줘라.”

흥이 오른 낙시꾼들은 즉석 회파티를 벌였다. 섬살이 애환과 낚시문화가 화두였다.

주인 이만오씨가 먼저 낚시문화를 집요하게 꼬집었다. “요즘 바다낚시 좀 한다는 사람들 말예요. 낚싯대는 물론 모자부터 장화까지 모두 수백만원씩 하는 일본산으로 치장하제. 그랗지만 ‘전국구’로 불리는 단 몇명의 프로를 빼면 국산장비와 별 차이도 못 느낀다 아이가. 기자 양반 이것만은 고치자고 꼭 쓰쇼.” 사정이 이러니 일본 유명 낚시용품 회사들은 추자도까지 이른바 전문 낚시꾼을 ‘필드테스터’로 내보내 제품을 홍보한다고 말한다. 반면 국내 낚시용품점들은 가격파괴 경쟁으로 등골이 휘고 있다.

뭍에서 실패를 맛본 뒤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처가에 남겨두고 ‘일류 조사’가 되겠다며 추자도에 정착한 박현석(30)씨. 낚시가이드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낚시 관련 정보를 마치 무협소설처럼 풀어냈다. “일단 고등어가 낚이면 그 자리는 포기해라. 감성돔과 그 놈은 상극이다. 학꽁치가 잡히면 목줄을 늘여라. 감성돔은 학꽁치와 함께 논다. 단 수심이 깊은 곳을 택한다. 수온이 갑자기 내려가면 대부분 낚시를 포기하는데 이때가 50cm 이상 대물을 건질 찬스다. 어린애가 날 추우면 감기 걸리고 외출을 피하듯 물고기도 대어만 왕성하게 먹이활동을 한다”…. 물 색깔과 조황, 해저 지형 파악법, 유인용 밑밥 뿌리는 법 등 그의 얘기 보따리는 밑바닥이 없었다. 모두 입이 떡 벌어져 있을 무렵 결론을 냈다. “한뼘 이하 물고기는 무조건 놓아줘라.” 추자도까지 와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걸리는 대로 마구 가져가면 씨가 말라 월척의 꿈도 사라질 것이라는 이유다.

저녁 9시, 한동안 넋이 빠졌던 나는 물때에 맞춰 또 한번 출조했다. 이번에는 묵리 방파제가 포인트였다. 방파제 바윗돌 틈에 발이 빠지는 것조차 피하기도 힘겨운 왕초보에게 야간낚시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찌 끝에 붙은 2∼3cm 크기의 푸른색 야광 표지의 움직임을 통해 낚싯줄과 바늘 위치를 정확히 계측하고 적절히 미끼를 교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치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낚시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었다. 푸른색 표식은 반딧불이가 유영하듯 바람에 휘날리며 주변을 맴돌다 낚싯줄과 함께 온몸을 휘감았다. 겨우 던진 낚싯줄은 바람에 떠밀려 옆사람 낚싯대에 꼬이기를 몇번. ‘낚싯바늘로 옆사람 코라도 꿰지 않게 해주소서….’ 찬바람 맞서 발을 동동 구르며 노심초사했다. 어쩌다 한번 제대로 물 속에 던지면 몇십분이고 무작정 버텼다. 그 수고로운 과정을 반복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사람 말마따나 나는 “손복은 좋았다.” 이날 밤도 10cm 안팎의 감성돔 3마리와 볼락 한 마리가 잡힌 것이다. 저녁 나절 배운 대로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다. 도대체 낚시꾼들은 뭐가 좋아 이런 고단한 일을 기꺼이 감수할까?

운과 기술의 확연한 차이

추자도에서 만난 낚시꾼들에게서 딱 부러진 이유를 듣지 못했다. 그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다”, “민물낚시에 비해 훨씬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 다수였다. 동행한 이씨의 설명에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다와 맞서 1대1 승부를 펼치다보면 어느새 힘겨운 세상 일을 나도 몰래 잊는다.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다.”

1월4일 새벽, 동틀 무렵 입질이 좋다 해 몸을 일으키는 데 바깥이 시끌벅적했다. 거센 풍랑을 마다않고 해남에서 80t짜리 첫배를 타고 50대 중반 낚시꾼 5명이 새로 들이닥쳤다. 이들에게 밤새 고민했던 질문을 던졌다. “뭐가 좋아 목숨까지 걸고 이런 일을 하십니까?”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바람기와 노름은 말릴 수 있어도 낚시는 말릴 수 없다”는 한 낚시꾼이 말했다. “내, 광주에서 삼성과 대우에 물품을 납품하던 업자였다. 고객사라 상전 모시듯 룸싸롱에 데려가 기백만원씩 들여 접대를 반복했지만 몸만 망가졌지. 결국 그들을 몰고 낚시를 다니기 시작했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빠졌네.” 그는 끝내 광주생활을 접고 해남에 정착해 바다낚시에 인생을 걸고 있다고 했다. 그와 동행한 송영보씨는 “내기 골프로 수백만원씩 날리는 것보다 남에게 피해도 안 주고 자연과 벗삼는 낚시가 훨씬 건전하다”면서 “핵심은 취미의 종류가 아니라, 어느 선에서 어떻게 조절하느냐”라고 말했다.

동틀 무렵 출조는 완전히 공쳤다. 거센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때부터 운과 기술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나는 낚싯대 한번 제대로 드리우지 못했지만, 이씨는 40cm 월척을 건졌다. “이제야 체면이 선다”며 야무진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제주로 떠나는 배를 기다렸다. 항구에 다다른 배는 온갖 장비로 중무장한 60여명의 낚시꾼들을 다시 추자도에 토해냈다. 모두들 월척의 꿈과 세상 고민을 하나씩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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