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편집장
2015년 12월28일 속보가 떴다. “한-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24년 만에 합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선언”. 모두 눈이 커졌다. 합의를 했다고? 어떻게? 게다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니? 아베 신조 총리가 느닷없이 대오각성이라도 해서 일본의 법적 책임과 성노예(Sex Slave·이른바 ‘위안부’를 가리키는 국제사회의 공식 용어다) ‘강제’ 동원을 인정한 것일까? 이어 합의문 전문이 송출됐다. 내용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공동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일어난 일이며 이런 관점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한국이 설립한 재단에 일본이 100% 돈을 출연하기로 했다. 또한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를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밝혔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이날 회견에서 공히 명시한 부분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말이었다.
다음날인 29일, 은 편집위원 기명 칼럼에서 “양국 지도자의 결단이 신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고 적었다. 은 사설에서 “앞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요 책임은 한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합의 이행을 판단하는 데) 소녀상 철거가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란 으름장도 놨다. 한국 언론에서는 협상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 비등했다. “졸속 합의”라는 점잖은 표현부터 “아베의 덫에 걸렸다”는 말까지 나왔다.
광고
외교라는 층위에서 평가해본다면 어떨까.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책임을 조금 더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했다’는 평이 다수다. ‘왜 일본 총리는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처럼 행동하지 못하느냐’고 분개하는 한국인이 많지만, 외교라는 장에서 당위와 현실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말해 현 시기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이 ‘작은 진일보’를 위해 한국이 내준 것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가장 치명적인 패착은 한국 정부 스스로 향후 행보를 결박해버렸다는 점이다. 위안부(성노예)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하고 향후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로 상호 비판하는 것을 자제한다는 약속을 일본에 해준 건 두고두고 족쇄가 될 수 있다. 기시다 외무상이 일본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우리가 잃은 건 10억엔뿐”이라고 말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사태가 이런 외교적 득실 계산으로 환원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성노예 강제 동원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여성들의 삶을 송두리째 유린한, 시효를 따질 수 없는 전쟁범죄이자 반인륜 행위다. 그런데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리들 개개인은 ‘일본놈들의 뻔뻔함에 분노하는 민족 공동체’라는 깔때기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그래서 늘 권력에 이용당하고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이 아니다. ‘책임의식’이다. 사건 이후에 태어난 자들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가해자의 은폐와 봉합에 맞서는 것, 피해자의 기억과 흔적을 보존하는 것, 무엇보다 피해자의 편에 함께 서는 것. 이를 통해 다시는 인류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책임의식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자기 존중이며, 미래에 태어날 수많은 타자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이다. 그렇기에 한국 밖의 세계에도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최종 해결”이라는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 마음대로 최종 해결인가. 돌아가신 할머니들, 여전히 살아 계신 46명 할머니들의 입장은 어디에 반영되었는가. 이번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의 자리는 어디 있는가. 최근 논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현의 자유”니 “학문의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의 입장문에서, 가장 아팠던 사람들에 대한 존중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윤리와 당위를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 나라가 이 꼴이라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증거 능력’ 엄밀히 따진 헌재…윤석열 쪽 ‘불복 논리’ 차단했다
[단독] 나경원의 ‘태세 전환’, 윤 파면되니 “이런 결과 예상”
윤석열 파면 뒤 김건희 검색했더니…달라진 인물 정보
“금리 내려라” “못 내린다”…파월, 트럼프와 정면충돌
‘파면’ 다음날도 집회…서울 곳곳서 “탄핵 자축” “불복종 투쟁”
‘윤석열 파면’에 길에서 오열한 김상욱 “4월4일을 국경일로”
김동연 경기지사 “대한민국 파괴하려던 권력 국민 심판에 무너져”
세계가 놀란 ‘민주주의 열정’, 새로운 도약의 불꽃으로
계엄→탄핵→구속→석방→파면…정의, 험난한 길 완주했다
‘탄핵 불복’ 이장우 대전시장, 윤석열 파면 뒤 “시민 보호 최선” 돌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