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레이스가 점입가경이다. 열흘 전과 비교해 공기가 달라졌다. 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때문이다. 최근 보름여 동안 지지율이 껑충 뛰었다. ‘문재인 독주’는 어느새 ‘문재인 대 안철수’ 구도가 됐다. 웹 커뮤니티들은 양 후보 지지자의 드잡이로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을 긋는다. 양자 대결이 실현되려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안철수 쪽과 단일화 내지 연대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 가능성이 낮고 발생해도 호남 지지자가 대거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보수’ 세력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갈등을 겪지 않았다. 가장 강한 후보를 뽑고, 반석 같은 지지층을 기반으로 밀어붙이면 대개 이겼다. 박정희 이후 딱 두 번, 리버럴 세력에게 정권을 내줬을 뿐이다. 그 보수가 지금 산산조각 났다. 누굴 찍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이다. 리버럴이나 좌파한테는 익숙한 상황이지만 보수에겐 처음 겪는 혼란이다. 이들의 사고 흐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문재인만은 절대 안 된다. 2) 문재인 당선을 막을 현실적 대안은 안철수다. 3) 그런데 안철수 뒤에는 박지원과 호남이 있다. 4) 그럴 거면 홍준표를 밀어줘야 한다. 5) 하지만 홍준표를 밀면 문재인이 당선된다. 여기서 5)는 다시 1)로 돌아가 되풀이된다.
선거 국면 각 세력의 이합집산·합종연횡 시뮬레이션은 늘 흥미진진하다. 좀 다른 측면에서 상황을 조망해도 의미 있지 싶다. 이를테면 보수의 재편이라는 관점. ‘재편’은 정권 교체로 인한 보수 내부의 지도부 교체 내지 세대교체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지속된 보수 헤게모니의 지각변동을 뜻한다.
이를 논하려면 먼저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5월 대선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짚어야 한다. 말할 것 없이 박근혜 탄핵이다. 탄핵을 가능케 한 것은 거대한 촛불시위의 에너지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더 명징하게 포착할 테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정희 레짐’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점이다.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많은 시민이 권력의 절대적 무능과 타락을 실시간 목도했다. “에이, 설마…”라고 부인할 때마다 그 온건하고 순치된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하는 보도가 터져나왔다. 어떤 환상과 수사로도 가릴 수 없는 마치 ‘실재(the real)의 출현’ 같은 사건의 연속. 비로소 우리는 박정희가 죽은 지 38년 만에 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지 56년 만에 그의 망령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1987년의 큰 투쟁조차 박정희 레짐을 깨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달리 말하면 1987년의 그 미봉과 타협이 30년간 박정희 레짐을 존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우린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박정희와 결별할 기회를 잡았다.
2016년 촛불시위에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급진적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주류였다 보긴 어렵다. 촛불시민 상당수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석방을 촛불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정치적 발언자들을 “빨갱이” “프락치”라며 쫓아냈다. 촛불시민 다수는 ‘전복’ ‘해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정상’ ‘질서’를 요구했다. 그것은 보수의 가치다. 요컨대 촛불은 ‘막가는 보수’를 향한 ‘합리적 보수’의 질타였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사실 극우반동 세력이다. 탄핵 국면에서 드러났듯 군사 쿠데타를 선동하고 획책하는 집단이었다. 불법, 탈법, 막말, 폭력이 일상화된 집단이 오랫동안 보수를 과대 대표해왔다. 그래서 사회 전체의 이념 스펙트럼도 왜곡되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정상적’ 민주정 국가에선 당연히 보수로 분류될 정치인, 이를테면 안철수·안희정 같은 이들이 ‘중도’나 심지어 ‘진보’로 불렸다. 이런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책과 이념에 걸맞은 정당과 지지자들 속에서 성장하고 합리적 보수로 진보좌파 정치인과 비전을 겨룰 때, 한국 정치는 명실상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은 극우반동 세력이 도태하는 ‘보수의 정상화’의 첫 단추가 잘 꿰일지 판가름 나는 선거다. 지지 여부를 떠나 안철수 후보의 역량과 역할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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