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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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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욕의 진심

한경오
등록 2017-05-30 20:01 수정 2020-05-03 04:28

예수가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한 것은 보통 메시아의 ‘이타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회자된다. 자기를 해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이해와 용서를 베푸는 무조건적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인지 모르나, 예수 역시 사회적 존재였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한다. 예수로서는 ‘대속’이 자기존재의 이유다. 자신을 십자가에 묶고 비웃는 자들의 존재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짊어진 임무를 상기하게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대속’이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보면 본디오 빌라도(로마 총독)와 로마 병사들은 그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어쨌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데 일조한 셈이다.

기독교도라면 아마 ‘궤변’이라 여길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언론이 취할 태도의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오늘날 언론은 그야말로 수난을 겪고 있다. 언론 스스로 말하는 저널리즘의 가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언론은 그저 좋은 말을 내세우며 뒤로는 자기 배를 채우는 사기꾼에 가까운 존재이다.

언론이 정말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이런 비난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거다. 예를 들면 ‘1등 신문’의 주필이 연루된 전 정권의 비리 사건은 어떤가. 검찰의 기소 내용대로라면 그는 지면을 향응과 맞바꾸었다. 이런 일을 과연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인간상을 ‘진보 언론’의 구성원도 공유한다고 말하는 건 진실과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나 이게 우리 언론의 민낯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냐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완벽한 존재여야 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걸 스스로 설명할 수 있냐는 게 중요하다. 언론인이라면 대개 저널리즘의 이상을 말한다. 이들에겐 만인이 행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저널리즘이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을 아무도 믿지 않는 요즘이야말로 이를 지키기 위해 존재를 거는 결기가 필요한 때다.

어떤 언론인은 대중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 것, 혹은 이에 맞서는 것을 저널리즘적 태도로 본 모양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기준으로 행동 방침을 정할 일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되는 것의 기저에 흐르는 게 무엇인지 포착하고 이를 저널리즘 방식으로 다루려고 시도하는 것이 언론인의 임무이다.

정치에선 선거 결과가 예상 밖으로 나왔을 때 “민심은 천심”이라고 한다. 사실 이 말은 유권자의 뜻을 무조건 따르라는 게 아니다. 미미한 인간으로서는 ‘천심’을 알 도리가 없다는 게 핵심이다. 홍수 한복판에서 뗏목을 거부하고 신에게 구원을 빌다가 결국 죽고 만 사람이 등장하는 유머를 떠올려보라. 도대체 그 뗏목이 신의 뜻인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말이다. 예수가 그 광경을 봤다면 이 글 서두에 나온 말을 재론했을 것이다.

언론사 인터넷 사이트에 줄줄이 쌍욕을 섞어 적대적 내용의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언론에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결국 돌고 돌아 저널리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를 자처하는 언론인이 있다면 ‘그들’의 목소리가 로마 병사들의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 언론’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저널리즘 방식으로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믿는다는 것, 가치를 좇는다는 것은 원래 고통스럽다. 해법이랍시고 사람들이 내미는 요구의 ‘액면’을 그대로 따르며 시류에 편승하는 건 저널리즘의 이상 따위엔 애초 관심이 없었다는 걸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다.

글·컴퓨터그래픽 김민하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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