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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국가의 복원 #그런데 민주시민은?

문재인 대통령
등록 2017-05-18 19:39 수정 2020-05-03 04:28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무총리와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를 직접 발표하고,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을 임명했다. 왜 이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설명했다. 앞으로도 자주 나와서 설명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이든 수석비서관이든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다. 오히려 질문에 능숙하지 않은 기자들이 균형추를 무너뜨리는 느낌이다.

대통령이 와이셔츠만 입은 채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수석비서관들과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공개됐다. 청와대 직원이 대통령의 재킷을 받으려고 하자 대통령은 “제 옷은 제가 벗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대통령과 셀카를 찍는다.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하는 데서 첫 번째로 어색하고, 대통령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게 두 번째로 어색하다”는 말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한 지 이틀 만에 벌어진 풍경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불거져나온 촛불의 요구 가운데 핵심은 정상국가의 복원이다. 여기서 정상국가는 세월호 참사 같은 국가 위기가 발생했을 때 컨트롤타워가 정상 작동하는, 그래서 생명과 안전의 손상을 최소화하는 국가다. 아울러 국가 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일상이 위기인 사람들이 사회에서 무력하게 배제되지 않도록 떠받치는 국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런 국가 개념을 거론하기조차 무색했다.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고, 청와대 비서관들은 대통령의 일을 대리하기보다 대통령을 감추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은 행여 대통령의 뜻에 어긋날까 복지부동했고,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처신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세력의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를 전용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두 사람’의 개인을 호위하기 위해 국가를 방치했다. ‘문재인의 이틀’은 이랬던 정부를 원래대로 되돌린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환호를 사기엔 충분했다.

일상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국가권력과 시민은 권력을 대리하는 주체와 맡긴 권력을 감시하는 주체로서 길항하는 관계다. 사람들이 문재인 정부의 일상에 익숙해지는 만큼, 문재인 정부가 권력에 익숙해지지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 민주주의자 문재인 대통령은 이 사실을 잘 아는 것 같다. 문제는 대통령을 ‘호위’하는 일부 지지자들이다. 소설가 공지영은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거 기간 내내 떠들던 사람들이 요구 사항을 줄줄이 올린다. 다 이뤄지면 파라다이스가 될 그런!”이라는 글을 썼다.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대통령에게 어떤 정책이나 국정 운영을 요구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다.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시민들이 박근혜에게 제대로 된 국정을 요구한 것처럼 말이다.

13년 전 비정규직법 제정 과정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진보정당에 “경제정책론 공부나 하라”고 일갈하고, 청년실업 대책을 묻는 대학생에게 “취업은 각자가 책임질 일이고 특정 학생을 취직시키는 일은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던 작가 유시민은 벌써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진보’와 ‘지식인’은 ‘어용’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다. 성찰 없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2002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최종 결정되던 날 경기도 덕평 청소년수련관에서 환호하는 노사모 회원들에게 “저는 여러분에게 약속했던 일을 할 겁니다. 저는 할 일이 많은데 여러분은 제가 대통령 되고 나면 뭐하지요?”라고 물었다. 이때 시민들은 각자 다른 말을 하다가 점점 “감시, 감시”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말을 듣고 "여러분 말고도 흔들 사람 꽉 있습니다. 뒤통수 칠 사람도 꽉 있습니다. 앞길을 막을 사람도 꽉 있습니다. 감시도 하고, 흔드는 사람들도 감시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이에 호응해 '흔드는 사람들'을 감시하겠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게 간절히 지지하던 대통령이지만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는지 감시하는 일도 잊지 않겠다던 그 민주시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재훈 기자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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