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동심’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1975년 아동문학가 이오덕(1925~2003)은 계간 겨울호에 평문을 실었다. ‘동심의 승리’. 부제는 ‘이윤복 일기 에 나타난 동심론’이다. 는 1964년 대구에 사는 11살 소년 이윤복이 쓴 8개월치 일기를 모은 책이다. 당시 한국 사회의 가난과 불평등, 그럼에도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이윤복의 마음이 감동적으로 담겼다. 이듬해인 1965년 같은 제목의 영화(감독 김수용)로도 만들어졌다. 당시 3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아 흑백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낡은 표현이 당시에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책 또한 출간 10년 만에 20판을 인쇄할 만큼 스테디셀러였다.
동심의 승리는 핍진과 순진이오덕이 이윤복의 일기를 ‘동심의 승리’라고 본 것은 글에 나타난 핍진함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핍진은 진실에 다가서 거짓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가령 이런 대목이다.
저녁 열 시쯤 되어 빵집 앞에서 순나를 만났습니다.“순나야, 이자 고만 집에 가자.”
“오빠, 한 시간만 더 팔다 가자.”
“순나야, 니 몇 통 남았노?”
“요고 두 통만 팔면 된다.”
하면서 껌통을 나에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병 때문에 누워 지내는 윤복의 집. 윤복은 동생 셋을 먹여살려야 하는 소년가장이었다. 동생들과 껌을 나눠 팔아야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윤복의 시선은 독자에게 누선(눈물샘)이 돼버린다. 이오덕은 윤복의 일기를 글 곳곳에서 소개하며 동심을 이렇게 정의했다. “만일 윤복이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가 행복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흉내나 내고 동화 속 왕자의 꿈만 꾸고 다닌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뚤어진 마음이며 또 그것은 얼마나 더 기막힌 불행이요, 비극일까? 그러기에 동심은 흔히 말하듯이 ‘천진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마음’이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으며, 차라리 그것은 바르고 착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순진성인 것이다.”
이오덕이 말하는 동심은 맹자가 말한 적자지심(赤子之心)에 닿아 있다. 어린아이, 특히 갓난아이의 얼굴은 붉은빛을 띠기 때문에 적자라고 이른 것이며, 그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맹자는 인간의 선함을 목격한 것이다. 이오덕 또한 윤복의 거짓 없는 일기에서 동심을 읽었다. 동시에 이오덕은 윤복의 엄청난 가난의 기록 앞에서 사회 비판과 풍자의 결을 읽어냈다. “아동문학이 단지 아동을 소재로 한 어른들의 장난감 문학이 아니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동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인간의 행복을 진지하게 염원하는 데서 창조되는 문학이라면 사회와 인간을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 서는 것이 양심적인 문학으로서 불가피하다. 윤복이 일기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순진한 눈으로 보고 겪은 것을 정직하게 쓰면 그것이 그대로 불행한 사회에서는 비판적인 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잔혹하고 야박한 건 어른의 ‘재단’
이오덕의 글이 발표된 지 40년이 지난 2015년. 그것도 5월5일 어린이날. 한 일간지 1면에 섬뜩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큰제목(여 초등생이 쓴 잔혹동시 ‘충격’)뿐 아니라 작은제목(동시집 ‘솔로 강아지’ 폭력성 논란)에서도 시의 성격을 폭력과 잔혹으로 규정했다. 기사는 야박했다. 책에 실린 동시 58편 가운데 ‘학원 가기 싫은 날’ 1편만을 문제 삼았다. 실상 시집에는 폭력적이거나 잔혹하게 읽힐 수도 있는 시가 몇 편 더 있다. 그러나 대다수 시들은 넉넉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2014년 한 어린이신문 문예상 장원을 받은 시 ‘표범’이 그런 예다.
사람들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표범
맹수지만 사람에게 길들여져
자기가 누군지 잊어버린
이제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겠네
무엇이 기억나는지
눈 밑으로 눈물이 흘러 생긴 삼각형
얼굴은 역삼각형
눈물과 얼굴이 만나
삼각형이 되어버린 표범
초등학교 5학년인 이순영(10)양의 시집 는 지난 3월30일 출간됐다. 출간 직후인 4월3일, 앞에 인용한 어린이신문은 이양의 시집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기사 제목부터 판이하다. ‘‘꼬마 시인’ 이순영양 “뿔난 마음, 동시로 써보세요”’. 이 기사는 이양의 인터뷰와 함께 시집에 실린 시들에 대해 “좋아하는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만 쓰지 않고 자신이 싫어하고 화가 났던 경험에 대해서도 시로 쓴다”고 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문제의 ‘학원 가기 싫은 날’도 언급하고 있다. 7월9일 기자와 만난 아버지 이인재(43·변호사)씨는 “책이 나온 뒤 가족이 다니는 교회와 순영이 반 아이들한테 책을 나눠줬다.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조세희의 사진·산문집 (1985)에는 초등학생들의 일기가 많이 소개돼 있다. 강원도 정선군의 탄광 마을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담겼다. 이 일기들은 그곳 사북초등학교 교사였던 임길택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기도 했다. 그 책에는 이런 시가 있다.
삼학년 때 밥을 안 싸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5학년 김상은)모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다. 이윤복이 그러하고 이순영이 그러하며, 인용한 시를 쓴 아이가 그러하다. 배가 고파 아무나 때리고 싶다는 마음과, 학원에 가기 싫어 ‘엄마’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것인가. 매한가지 “뿔난 마음”이다. 이순영양은 앞서 든 어린이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건이나 동물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상상해보면 금세 동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잔혹한 세간의 비난이 쏟아진 시 ‘학원 가기 싫은 날’ 또한 이양 본인의 마음뿐 아니라 또래 친구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공감했기 때문에 나온 표현 아닐까. 이양의 가족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산다. 이양의 아버지는 “순영이가 영어·미술 등 학원을 네댓 곳 다녔다. 같은 동네 아이들보다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아내가 순영이의 시를 본 뒤 다른 학원은 그만뒀다. 순영이가 좋아하는 복싱과 미술 학원만 보내고 있다”고 했다.
“싫어하고 화난 경험도 시로 썼다”5월5일 어린이날 한 일간지의 보도에 뒤이어 거의 모든 언론이 이양의 동시를 기사로 다뤘다. 기사마다 이끼처럼 댓글이 매달렸다. 동시보다 댓글이 더 잔혹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이코패스 아니냐.” “정신과 치료 받아라.” “엄마가 대필해준 거 아니냐.” “노이즈마케팅이냐.” 심지어 “사탄의 영이 들어 있다” 운운하는 극언까지 나왔다. 출판사의 시집 회수 처분에 반발해 가처분 신청을 냈던 이양의 부모가 결국 법정 다툼을 포기하게 된 이유다.
시집은 논란이 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대부분 폐기 처분됐다. 출판사는 책을 폐기하는 장면까지 사진으로 찍어 누리집에 올렸다. 사진을 보게 될 이양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김이구는 “어린이의 글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게 논의된 적이 별로 없다. 동시집을 절판시키라며 험악하게 한 건 과도했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가족, 독자 등이 판단할 시간을 주는 것이 성숙한 자세였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양과 시를 변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잔혹한 동시를 낳은 잔혹한 현실이 더 문제라는 지적, 잔혹성보다 아이의 뛰어난 자질에 주목하는 작가도 있었다. 글 자체의 문학성뿐 아니라 그것을 출간하는 데 따르는 사회적 책임, 재능에 대한 교육 등 다층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이양의 어머니 김바다씨는 2011년 등단한 시인이다. 그는 “‘학원 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 같이 읽고 얘기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시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를 쓰면서 엄마에 대한 억압을 아이가 푸는 것 같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이오덕의 통찰처럼 불행한 시대를 견디는 어린이들의 정직한 시는 그대로 사회비판 문학이 된다. 이윤복이 그러하고 이순영이 그러하다. “한 국가의 진정한 위상은 ‘그 사회가 어린이를 어떻게 보살피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유네스코)는 선언에 비춰볼 때 2015년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방정환재단은 2009년부터 해마다 ‘국제 비교로 본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주요 지표인 물질적 행복, 보건과 안전, 교육, 가족과 친구 관계, 행동과 생활양식 항목에서는 대부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100점 기준)를 웃돈다. 그러나 주관적 행복 항목에서는 6년째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60~70점 수준에 머물고 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어린이·청소년도 22.8%에 이른다. 특히 성적 상위집단(20.7%), 중간집단(21.1%), 하위집단(26.3%)으로 구분하더라도 자살 충동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 당국은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것을 제정해 7월21일 시행에 들어간다. 예·효·정직·책임·존중·배려·소통·협동 따위의 마음가짐을 제도권 교육에서 ‘성취해야 할 항목’으로 다루겠다는 취지다. 이들 나열된 가치 가운데 한국 사회에서 온전하게 ‘성취’된 것이 있는지 의문이다. 여전히 ‘동심’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이양의 부모는 지난 5월 불거진 동시 논란과 관련한 학술서를 준비하고 있다. “의 ‘부활’을 위해서예요.” 신문·방송에 보도된 기사와 칼럼뿐 아니라 아동문학 연구자들의 글도 함께 실을 참이다. 책은 한두 달 안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양은 ‘학원 가기 싫은 날’ 대신 다른 시를 ‘새로운 동시집’에 넣기로 했다. 어느 날 머리를 감다가 떠올라 적은 시란다. 제목은 ‘울음’이다.
“눈이 젖었다/ 내 모든 것이 젖었다.”
이양의 어머니는 말했다. “아이들 둘 다 아빠처럼 공부해서 법조인이 되었으면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논란 이후 저도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고 미래보다는 현재를 들여다보며 감사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네요. 어려운 날들을 헤쳐나오다보니 산다는 것이 무언지, 가족이 무언지 깨달음도 얻게 되었고요. 감사합니다.”
1923년 5월1일 오후 3시 소파 방정환은 서울 천도교 회당에서 우리나라 첫 어린이날을 선언하는 글을 발표한 뒤 거리행진에 나섰다. 선언문 12만 장을 시민 1천여 명과 함께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거기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주시오. (…)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주시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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