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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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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과 수금

등록 2015-05-22 17:09 수정 2020-05-03 04:28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제자와 추종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했다. 빛이란 타인에게 본보기가 되는 존재를 뜻할 테고 소금이란 타인에게 쓸모 있는 존재를 뜻할 터이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을 반드시 기독교의 도덕률로만 볼 필요는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모범을 보이고 도움을 주는 이를 칭송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극히 보편적인 일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국민 절대다수가 빚진 자

그러나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규범이 과연 ‘빛과 소금’일까? 나는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빚과 수금’이라는 규칙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방식을 지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이제 이 세상의 사람들은 빚진 자와 수금하는 자로, 고통을 받는 자와 고통을 주는 자로 나뉘게 된 것이다.

‘빚과 수금’이라는 키워드로 인간관계를 헤아리는 것은 삭막해진 사람들의 인성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삶 자체가 부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의 심각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 4분기 기준으로 가계신용 잔액은 1089조원이었다. 특히 4분기 들어 가계부채는 29조8천억원이 늘었는데, 이는 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의 증가액이었다고 한다.

이같은 통계는 국민의 절대다수가 빚진 자로 살아가는 사태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사태 이면에 간과하기 쉬운 현실이 있다. 빚진 자의 다수는 동시에 수금하는 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수금을 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고통을 줘야 한다.

이렇게 대꾸할 수 있다. 뭔 소리야, 나는 수금을 하지 않는데? 내 빚 갚느라 혀가 빠지게 살고 있는데? 하지만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누군가 더 돈을 받는다는 사실은 누군가 덜 돈을 받는다는 사실과 불가분하게 연결돼 있다. 한 직장에서, 아니 한 사회에서 남성의 임금은 여성의 저임금으로, 정규직의 임금은 비정규직의 저임금으로 보장된다.

실제 이런 일도 있었다. 직장에서 누군가 정리해고됐다. 남은 동료들이 괴로워하자 직장 상사가 말했다. “해고된 이의 임금으로 당신들의 임금을 올려주겠노라!” 여기서 나는 ‘간접적 수금’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을 빚진 자라 여기며 괴로워하는 와중에 우리의 통장에는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로부터 수금한 돈이 입금되고 있다.

빚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노력에 일생을 바치는 삶, 하나의 빚에서 벗어나 또 다른 빚으로 이동하는 삶, 빚진 자가 수금하는 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 일컫는 삶, 이런 삶에서 타인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특히 더 큰 빚을 진 존재, 빚을 갚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존재들을 향해서 느끼는 감정은 ‘안타깝지만 내가 저들이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안도감일 때가 많다.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와 우정

그러나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일을 목격해왔다. 빚진 자들이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는가?’라는 공통의 질문을 던지는 곳에서. 비참의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빚진 자들이 연대하고 우정을 나누는 곳에서. 빚진 자들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 삶의 주인이 되기를 선택한 곳에서. 용산에서, 대한문에서, 강정에서, 밀양에서, 공장 굴뚝에서, 광화문광장에서,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빛과 소금’이라는 밴드가 있었다. 주로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감미로운 노래들을 발표하던 밴드였다. 나는 문득 ‘빚과 수금’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상상해본다. 이 상상의 밴드는 빚진 자의 편에 서서 수금하는 자에 맞서는 노래를 부른다. 이 상상이 너무 즐거워서 당장이라도 밴드 멤버를 모집하고 싶은 심정이다.

심보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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