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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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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봐줄 사람이 있어야 아프지”

생활밀착형 생명지킴이 활동으로 자살률을 끌어내린 노원구…

정신건강증진센터 설치되지 않은 곳 자살률 45.2로 전국 평균 31.7보다 높아
등록 2014-12-12 15:29 수정 2020-05-03 04:27

2015년 예산안이 12월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정부는 내년에 375조4천억원의 살림을 꾸린다. ‘예산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을 바꾸는 1% 지렛대 예산’ 시리즈도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마친다. 과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좋은예산센터는 그동안 4주에 걸쳐 국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함에도 예산이 제대로 도달하지 않는 7가지 분야의 현실을 살펴봤다. 연재는 끝나지만 보도한 내용이 관련 예산에 반영될 수 있도록 추적 보도를 이어갈 예정이다. _편집자


노란 콩나물이 시루에 한가득, 빨간 바가지로 물을 주는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김점덕(79)씨가 거실 장식장 한가운데 자랑스레 붙여놓은 사진 속 모습이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청이 위촉한 ‘생명지킴이’ 홍오복(61)씨가 찍어서 뽑아줬다. 홍씨는 지난봄부터 매달 2차례씩 콩나물 콩을 가져다준다. 홀로 사는 김씨한테 콩나물은 때론 자식 같기도, 때론 친구 같기도 한 존재다.

지자체 최초로 ‘생명존중 조례’ 마련

지난 12월3일 찾은 서울 노원구 중계동 주공아파트3단지는 영구임대아파트다. 김씨가 살고 있는 311동만 해도 256가구 중 100가구 이상이 독거노인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다. 통장인 홍씨는 평소 이들의 생활을 살피고 심리상담을 한다. 노원구청이 김성환 구청장 취임 뒤 ‘자살률 최저 도시’ 만들기 사업을 펴면서, 홍씨 같은 생명지킴이 720여 명을 위촉했다. 독거노인들에게 마음건강평가 설문을 진행하고, 우울증 등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방문간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특별관리를 한다.

노원구청 ‘생명사랑 콩나물 기르기’에 참여하고 있는 독거노인 김점덕씨의 서울 노원구 중계동 집에 지난 12월3일 ‘생명지킴이’ 홍오복씨(오른쪽)와 간호사가 방문했다. 장식장에 콩나물 기르는 김씨 사진이 걸려 있다. 류우종 기자

노원구청 ‘생명사랑 콩나물 기르기’에 참여하고 있는 독거노인 김점덕씨의 서울 노원구 중계동 집에 지난 12월3일 ‘생명지킴이’ 홍오복씨(오른쪽)와 간호사가 방문했다. 장식장에 콩나물 기르는 김씨 사진이 걸려 있다. 류우종 기자

콩나물도 그냥 평범한 콩나물이 아니다. 하루하루 자라는 콩나물을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게 하자는 취지로 지난 5월에 시작된 것이 ‘생명사랑 콩나물 기르기’ 사업이다. 노원구는 2011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최초로 ‘생명존중 문화 조성 및 자살예방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자살예방 모범 지자체로 꼽힌다.

“어르신, 겨울철이라 운동은 좀 하세요?” 홍씨와 함께 김씨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선현희 간호사가 찾아왔다. 노원구에서는 자살위험군 노인 2천여 명에게 방문간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간호사가 살갑게 손을 붙잡고 묻자 김씨는 속마음을 꺼낸다. “실은 아파도 누가 봐줄 사람이 있어야 아프다 하지….”

311동 7층에 나란히 살고 있는 정복주(75)씨와 남신자(72)씨도 콩나물을 기른다. 남씨는 “콩나물이 귀여워서 만날 들여다본다”고 했다. 할머니들에게 활력이 되고 있는 건 콩나물뿐이 아니다. 노원구청은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노-노 케어’ 사업도 자살예방과 연계시켰다. 정씨와 남씨는 상담교육을 받고 일주일에 3차례씩 외로운 노인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주는 대가로 월 20만원을 번다. 혼자 살더라도 자식이 있는 이들은 그래도 덜 외롭다. 홍씨는 “7○○호 할머니만 해도 자녀가 없고 파킨슨병을 앓으며 혼자 누워만 계신다. 가끔 찾아뵈면 길게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지자체에만 맡겨놓다보니

노원구는 65살 이상 노인 인구와 기초생활수급 인구가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가장 많은 지역이다. 외로움과 생활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이다. 이 때문에 노원구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3명(2009년)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2012~2013년 노원구에서 자살한 219명 중에 65살 이상 노인이 88명(40.2%), 기초생활수급자 28명(12.8%), 무직자 178명(81.3%)이었다. 노원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992년(8.3명)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1년(31.7명) 최고점을 찍고 2013년에는 28.5명을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위고, OECD 평균인 12.3명(2011년 기준)의 2.3배 수준이다. 노원구는 생활밀착형 생명지킴이 등 자살위험군을 일찍 발견해 보건·상담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살률을 24~25명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최근 노원구는 2018년까지 자살률을 12명 수준으로 낮추기 위한 ‘제2차 자살예방 4개년 종합대책’을 세웠다. 생애주기별 맞춤형 자살예방 프로그램 개발, 중·장년층 인구의 50%인 20만 명에 대한 마음건강평가 등의 사업에는 총 24억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하다. 노원구청이 19억6700만원, 서울시가 4억6천만원을 충당한다. 자살예방사업을 펴나가는 데 가장 큰 현실적인 제약은 예산이다. 노원구청은 국민건강증진기금과 복권기금을 자살예방사업에 쓰자고 정부에 건의한 바 있다. 김태일 좋은예산센터 소장(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은 “지자체에만 자살예방사업을 맡겨둬서는 안 된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책임질 일인데 지자체장의 의지에만 맡기다보니 자살률이 높은 농어촌 지역에서는 자살예방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문제점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지난해 펴낸 ‘자살예방사업의 문제점과 개선과제’라는 보고서에서 관련 예산이 2013년 48억원으로 보건 분야 예산의 0.06%에 불과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올해 관련 예산이 75억원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일본이 2006년부터 범정부 차원에서 자살방지 프로그램 개발 등에 연간 3천억원 이상(2013년 기준)을 지원하는 데 견줘서도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일본은 막대한 예산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내각부가 총괄해 11개 부처 합동으로 ‘자살종합대책회의’를 열고, 약사·미용사 등을 자살위험군을 발견하는 ‘게이트키퍼’로서 교육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회적 질환으로 여기는 인식전환 필요

반면 우리나라는 보건복지부가 자살예방사업을 총괄하지만, 관계 부처 간이나 중앙정부-지자체 간, 민간기관과의 협조에 소극적이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빈 구멍’이 나타난다. 당장 자살시도자나 자살위험군에 대한 지원을 맡게 돼 있는 보건복지부의 민간 위탁기관인 정신건강증진센터만 봐도 그렇다. 정신건강증진센터의 설치·운영은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마련된 예산 50%와 지자체 예산 50%가 합쳐져 이뤄진다. 이 때문에 예산이 없어 정신건강증진센터를 설치하지 못하는 지자체도 생긴다. 광역지자체의 50%, 기초지자체의 56.5%에만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설치돼 있는 형편(2012년 6월 기준)이다. 2011년 기준으로 정신건강증진센터가 설치되지 않은 61개 시·군·구의 평균 자살률은 45.2명으로 전국 평균인 31.7명보다 월등히 높았다.

국회예산처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지방정부 예산 50%가 확보되지 않았더라도 정신건강증진센터의 설치·운영이 시급한 지자체에 우선적으로 예산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정신건강증진센터와 민간상담소 등에서 근무하는 상담 관련 업무 담당자 14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 협조를 강화하기 위한 1순위 과제로 ‘예산 증액’이 꼽혔다.

“자살은 ‘집단발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공중보건학적, 사회적 문제의 하나다. 한 주에 270여 명이 자살하고 있다는 건 매주 세월호 한 척이 침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적 질환으로서 자살을 여기는 인식의 전환, 노원구처럼 지역사회를 겨냥한 올바른 자살예방 대책의 수립이 필요하다.”(‘자살예방연구회’ 회장인 김동현 한림대 의대 교수)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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