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자와 함께하는 삶에서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결코 이혼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혼한 전력만으로도 당신의 인격은 훼손될 수 있다. 이혼을 하더라도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라면 잠자는 시간을 제하고는 몽땅 양육비 벌이에 매일을 바쳐야 한다. 돈 버는 기계에서 벗어난 잠깐의 취미생활도 호사요, 매정한 부모라는 비난의 근거가 될 수 있다.
40일 단식보다 더한 고난일을 하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노조에 가입하거나 도움을 청할 생각 따윈 말고 그저 참아야 한다. 노조 가입 전력이나 친분만으로도 당신은 ‘순수한 시민’의 자격을 잃을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생때같은 자식을 무참히 잃고도 왜 우리 아이가 죽어야 했느냐고 울부짖어서는 안 된다. 구조를 서둘러라 재촉해서도 안 된다.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 해서도 안 된다. 당신의 행동과 발언의 의도는 물론, 감정의 진정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했음직한 선택들도 당신에게서 진정성의 자격을 박탈할 이유가 되는 게 바로 이 사회니까. 온갖 허황된 유언비어와 따가운 의혹 앞에 마이너스통장 사본까지 내보여야 했던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씨. 40일 넘도록 곡기를 끊어야 했던 고통보다 더 컸을지 모를 고난을 감내하는 그에게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본다.
김영오씨가 받아야 했던 부당한 질문들은 언젠가 나와 이웃들을 겨냥할 수도 있는 모진 질문들이기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안 그래도 총체적 부실 덩어리인 이 나라에서 박근혜 정부 들어 안전을 위한 규제가 ‘개혁’의 이름으로 줄줄이 폐지 또는 완화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저리 침몰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유가족의 면담 요구도 외면한 채 규제 완화에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위험은 도처에 널려 있고, 그 위험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누가 참사의 희생양이 되느냐는 미시적 우연의 문제겠으나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 희생자가 대개 가난한 이들 중 누군가라는 사실은 거시적 필연의 문제다. 그래서 세월호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나와 이웃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젠가 나에게 피해자의 자리가 돌아왔을 때 내 삶의 이력이나 정체성 어느 것이든 진정성을 폄훼하는 근거가 될지 모른다 생각하니 오싹해진다.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지금 헌법이 보장한 권리도, 행복도, 진실도 포기한 채 사회적 죽음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끔찍하다.
만약 내가 총에 맞는다면얼마 전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흑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직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만약 내가 총에 맞는다면’(IfTheyGunnedMeDown) 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미국 <nbc> 뉴스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어딘가 불량해 보이는 브라운의 사진을 사용했는데, 당연히 피해자에게 불리한 암시적 효과를 낳았다. 이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사진과 평범하거나 훈훈해 보이는 사진을 나란히 게시하는 운동이 시작됐다. ‘만약 내가 총에 맞는다면 언론은 어떤 사진을 사용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피해자에게 외려 당할 만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기란 이토록 쉽다. 한 사람의 죽음이 드러낸 불평등의 깊은 속내를 가리기 위해 피해자의 이력을 선택적으로 들추고 진정성을 흠집 내는 일이야말로 정치다.
지난해 프랑스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출제된 철학 시험 문제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였다. 저따위 얄팍하고 차가운 진정성의 기준을 들이대는 정치에 맞서지 않는 한, 우리에겐 인간됨의 윤리도, 진실을 알 권리도, 집단적 운명에 동참할 권리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유가족에게 ‘비정치성’을 요구할 수 없는 이유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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