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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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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놈의 손수레

등록 2014-08-11 16:38 수정 2020-05-02 04:27

“있어서는 안 될 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과거부터 지속돼온 뿌리 깊은 적폐다. 국가 혁신 차원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육군 28사단에서 발생한 가혹행위 사망사건을 두고 대통령이 일성을 내뱉었다. 듣는 귀가 아우성을 친다. 넉 달 전 세월호 참사를 두고도 대통령은 그리 말했지. ‘적폐’란 도려내야 할 문제의 깊이를 가리키기 위함이 아니라 현 정권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을 과거로 돌리기 위한 말치장이었지. ‘국가 혁신’이란 몇몇 괴물로 지목된 이들을 솎아내고, 언제고 괴물이 될지 모를 국민의 인성을 단속하는 일로 생색내겠다는 소리였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 사건도 곧 잊히고 또 다른 ‘윤 일병들’이 또다시 ‘세월호’에 승선하겠구나. 이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저 영혼 없는 대사를 얼마나 지겹도록 들어주어야 하나. 진실을 향한 길을 내고자 곡기마저 끊은 채 거리로 나앉은 세월호 유가족들도 대통령의 말을 나처럼 듣지 않았을까.

유사한 구조를 가진 다른 장소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슬라보이 지제크의 는 물건을 훔친다고 의심받는 일꾼의 일화로 시작된다. 매일 저녁 경비원들은 공장 문을 나서는 그의 손수레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였으니까. 이 일화를 통해 지제크는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주관적(subjective) 폭력에만 주목할 때, 객관적·구조적 폭력은 비가시화된다고 지적한다. “구조적 폭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폭력은 단지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로만 보일 것이다.” 육군 28사단 사망사건도 마찬가지다. ‘괴물’에만 주목할 때 그들을 키워낸 장소의 폭력성과 권력체계는 가려지는 법이다.

성장 과정과 성격이 각양각색인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수용된 곳, 외부로부터 폐쇄된 환경, 일상적 전투태세, 엄격한 위계질서, 고된 내무생활.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할 갈등을 통제하고자 상급자에게 부여된 규율권력, 폭력에 대한 암묵적 승인, 기강을 흩뜨리는 자와 기강을 잡지 못한 자 모두를 비난하는 집단 압력. 폭력을 잉태하는 이같은 구조가 단지 육군 28사단만의 것일까. 다른 군은 안전한가. 유사한 구조를 가진 또 다른 장소는 없는가.

그녀는 외고에 입학하자마자 조류독감에 걸렸다. 학생이 기침을 콜록거리기만 해도 응급차로 실어가고 의사의 완치 증명서가 있어야 기숙사에 입실시킬 정도로 건강관리에 민감한 학교였다. 전염성 질병에 걸렸다는 건 다른 학생의 공부를 방해하는 ‘병균덩어리’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공기가 학교를 지배했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그녀의 감염 사실은 학교에 널리 퍼져 있었고, 이윽고 따돌림과 은밀한 폭력이 시작됐다. 몇 달간의 구조 요청을 담임과 학교는 묵살했다. 학교폭력 신고를 접수하자 학교는 친구관계를 잘 풀지 못하는 그녀의 정서 상태만을 문제 삼았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지난해 경기도의 한 외고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올 4월 진주외고에서도 기숙사 자치위원인 선배가 후배의 기강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해 1학년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학교는 선배에게 후배를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규율권력을 부여했다. 서울의 한 사립고 기숙사에서 2학년 자치회장이 1학년 후배를 불러내 성폭행한 사건도 최근 알려졌다. 학교가 내놓은 대안은 고작 학교폭력 예방교육이다. 군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 강화를 대책이랍시고 읊조리는 대통령의 인식과 정확히 닮았다.

‘잡음’을 일으킨 큰 사건에만 주목하는 한

규율권력이 폭력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장소, 폭력적 관계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그 집단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도인 장소라면 인간의 존엄은 이미 폐허다. 규율권력이 간혹 정도를 벗어나 ‘잡음’을 일으킨 큰 사건에만 주목하는 한, 우리는 결코 폭력이 곧 정상상태인 폐허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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