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별로 없고 날씨도 습한 여름 어느 날, 가만히 앉아 공포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이런 여름엔 무서운 영화를 본다거나 혹은 호러게임을 해야지 덜 덥지 않을까 이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막연하게 생각한다. 우선 며칠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그 전에 든 보험이 만기일에 다다르자 어머니는 이 풍진 세상에 아들내미가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돼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납부해야 하는 보험상품을 설계사 친구에게 듣고, 내게 이런이런 보장이 있다고 하면서 물려줄 재산은 넉넉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라도 들어야 한다며 가입을 권유하셨다. 이 정도의 보험금을 내기엔 내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않았으나 설계사 아주머니는 다음달이면 이 금액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금액을 납부해야 한다며 가입을 적극 추천했다. 최근에 일어난 많은 사고의 여파로 가입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말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font size="3">확정적 고의와 미필적 고의 </font>
물론 그런 일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마 내가 그런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까 하는 심드렁함이 있었고 내 사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 아주머니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떠올려보니 또 이렇게 피해다녀선 안 되겠다 싶어 결국 가입을 했다.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각종 암, 뇌졸중, 심근경색, 류머티스 관절염 등의 병명은 물론이요 최근 해외여행 이력이 있느냐는 등의 질문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것이, 평소라면 그저 그랬을지도 모를 텐데 어떤 면에선 두렵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며칠 안 가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보험회사에서 다른 상품을 소개하는 전화가 왔고 수화기 뒤에 있는 그 사람 역시 빠른 속도로 질병·입원 이력에 대해 묻다가 역시나 최근에 참 무서운 사고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나는 바쁘다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마 나는 어딘가에서 무서운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무서운 사고들을 얘기하니 무서워졌을 것이다.
조금 더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콩밥 며칠 먹은 덕택에 배운 법률 용어 중에 ‘미필적 고의’와 ‘확정적 고의’라는 것이 있다. 일단 둘 다 고의다. “길 가던 친구를 옆으로 확 밀쳐서 반드시 무릎을 까지게 하겠다”는 게 확정적 고의라면 “이 친구를 옆으로 밀치면 무릎이 까지겠지, 일단 해보자”는 미필적 고의다. 확정적 고의를 가졌다는 사람들이야 어떤 아재들이 하도 말한 덕에 익히 알고 있다. 남한을 반드시 적화통일 하고 말겠다는 야욕을 가졌던 혹 달린 공산 수괴 김일성이 그랬을 테고, 비행기 두 대로 미국 뉴욕 한복판을 순식간에 재로 만든 오사마 빈라덴이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맨날 실패하지만 우주 최고를 꿈꾸는 의 귀염둥이 악당 로켓단이 그랬을 것이다.
내심이야 알 턱이 없지만 미필적 고의를 가졌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얼마 전에 시너를 지하철에 뿌리고 불을 댕겼던 화병 난 할아버지가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고, 이역만리 타국에 둔 자식이 들을 거라 생각했는지 유세차 마이크에 대고 미안하다고 크게 소리친 어떤 후보가 그랬을지도 모르며, 흐르는 눈물을 클로즈업하면 대통령께서 정말 슬퍼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할 거라고 줌 버튼을 누른 누군가의 손가락이 그랬을지도 모르며, 이렇게 길바닥에 누워 있으면 성경에 쓰인 죄를 짓는 사람이 줄어들겠지 하며 퍼레이드 행렬을 막았던 누군가의 등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font size="3">살아서 보험금 내자</font>나열해보니 확실히 그랬을지도 모르는 경우가 약간 더 무섭다. 보험 아줌마가 그럴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덕택에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했겠지. 열심히 살아서 보험금 내자. 나 파이팅!
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박정근의 노 땡큐!’를 이번호로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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