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특수라고 한동안 가게가 바쁘게 돌아갔다. 어딘가에 출마할 사람이 많게는 하루에 서너 명씩 왔던지라 가끔 휴일에도 문을 열어야 했다. 사진관 이전 개업 뒤 겪는 첫 대목이라 휴일도 마다하고 아침에 출근해서 차 끊기기 직전에 퇴근 지하철에 오르는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간만에 열심히 사는 사람 느낌이 들어 집에 들어가서도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음주를 할 시간은 물론이고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게임을 할 시간도 없었다. 잠깐 고백하자면 사진관에 일이 없으면 게임으로 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훌륭한 악당
후보 등록 기간이 끝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스케줄이 싹 비워졌고, 나는 간만의 휴식을 즐기기 위해 컵라면과 비타민 음료를 챙겨 컴퓨터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무슨 게임을 할지 고르다가 일명 ‘똥 피하기 게임’을 선택했다. 컵라면과 이 게임의 제목은 영 맞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 풍진 세상을 살려니 강해진 비위 덕택에 상관하지 않았다. 자 여하튼 시작! 이 게임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똥을 맞지 않기 위해 왼쪽 오른쪽 이리저리 피하는 게임이다. 위 아래는 없고 왼쪽 오른쪽만 잘 피하면 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 3분쯤 지났을까, 단순히 쏟아지는 똥만 피하면 되는 이 극악무도한 단순함에 금방 싫증을 느껴 나는 다시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했고, 요즘 가장 핫한 용의자들의 소식을 찾아봤다. 그게 누구냐면 바로 일명 ‘아해 할아버지’ 유병언, 그리고 그의 일가다. 특히 사진가인 나는 유병언이 ‘아해’라는 가명을 쓰면서 그동안 미국·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의 나라에서 전시한 행보를 비롯해 일흔 넘은 백발의 아해가 엄청난 무게의 망원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번쩍 들어 대중 앞에 포즈를 취하는 모습 등에서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충격을 느꼈다. 베르사유궁전에서 전시회를 하고 프랑스의 시골 땅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들이는 얼굴 없는 억만장자 한국인 포토그래퍼라니! 이건 내가 케이블 TV로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선수들이 의자로 서로를 후려치는 것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흡사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유병언과 그의 일생이 마치 ‘007 시리즈’나 여타 액션영화에 나왔던 훌륭한 악당들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일단은 억만장자, 그리고 자선사업가·기업가·화가·조각가·사진작가 등 어디서 인정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지고 있는 다양한 타이틀, 심지어 이상한 감각까지. 이를테면 영화 에서 악당 ‘한’이 리샤오룽(이소룡)과 결투를 벌이는 이상하고 비싸 보이는 거울로 가득 찬 방과 아해의 작품사진들이 서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금 유병언 일가는 검찰의 훌륭한 악역으로 분해 훌륭한 도피를 하고 있다.
추적자와 도망자의 쎄쎄쎄아들의 경우는 헬기로 체포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종교적 망명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금수원 문을 어렵게 열었으나 유병언은 간데없다. 헐~ 이 정도면 즐기는 게 분명하다. 이런 긴 추격전이 가능한 까닭이 뭘까? 아마 추적자와 도망자들이 훌륭한 쎄쎄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예고된 압수수색과 반복되는 최후통첩 등으로 추적자들 역시 바보 같은 착한 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니 젠장 이럴 거면 나 압수수색 할 때도 예고 좀 해주지.
영화에서 악역이 제대로 처단되지 않고 마지막에 복수를 다짐하더라도 별로 무섭지 않은 이유는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속편을 기대할 여지를 선사하는 것일 텐데, 지금 이 상황이 영화도 아니고 속편이 나와선 안 되는 일임은 물론인데 이런 유치찬란한 톰과 제리의 추격전 같은 상황이 기사로 실려 똥무더기 같은 모양으로 쏟아지는 것이 똥 피하기 게임도 아니고 즐거울 리가 없다.
니들 지금 영화 찍니? 사람이 죽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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