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얄궂구로.” 환히 웃는 할매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린 책을 건네받고 김말해는 수줍게 말했다. “애썼다. 내가 글만 알았으만 이런 책 10권도 넘게 적어 남겼을 낀데….” 경남 밀양시 상동면 도곡마을에서 여든일곱 생을 이어온 여자, 김말해. 지난겨울,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가는 아궁이 앞에서, 할매의 정갈한 손 맵시가 소복이 배어 있는 부엌에서 나는 굴곡 많은 그녀의 세월이 전하는 이야기 가락에 먼저 취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봄. 글 모르는 게 그리 섧다던 할매에게 그녀의 첫 번째 책이자 어쩌면 마지막 책일지 모를 를 건넸다.
“하루라도 내 나라 싶은 날이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말해 할매의 생에는 한국 근현대사가 낳은 비극이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다. 일제시대 혹독한 공출과 가난으로 맨발로 산천을 다녔다던 할매는 ‘위안부’ 징집을 피해 열일곱 나이에 도곡마을로 시집왔다. 5년도 올케 살아보지 못한 남편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끌려간 뒤 여태껏 행방조차 모른다. 사라진 아들 찾으려고 온 천지를 헤매다니던 시어머니는 석 달 뒤, 위아래로 피를 토하다 숨을 거뒀다. ‘엄마 엄마, 집에 가자 집에 가자. 물 무섭다 물 무섭다.’ 남겨진 생이 버거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어린 아들 둘 손 붙잡고 저수지 앞에 섰을 때 작은아들이 이리 할매를 돌려세웠다. 국민학교도 못 마치고 나무하러 나온 큰아들은 ‘지 아부지 죄가 있나 없나’ 알아보려 베트남 파병길에 올랐다가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리고 할매는 생의 마지막 굽이에서 또다시 송전탑과의 전쟁을 만났다.
“하루라도 내 나라 싶은 날이 없었다.” 국가가 죄를 씌워 남편을 끌고 간 지 10년, 좋은 날 받아 그 넋을 위로한 건 할매였다. 국가는 신산스럽기 짝이 없던 그녀의 세월에 고단함만 얹었다. “이 무거운 짐을 어찌 이고 왔는교.” 그녀가 짊어진 무게를 알아채고 곁에 와 살핀 이는 할매의 이웃들, 여자들이었다. 국가는 베트남 전장에서 반송장 상태로 큰아들을 돌려보냈다. 상이용사 판정을 받아내는 데도 10년의 기다림과 뒷돈이 필요했다. 평생 변변한 직장도 없이 온갖 ‘허드렛일’을 하러 다니던 큰아들은 간신히 얻은 직장에서 몇 년 일해보지도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내처졌다. 그 뒷바라지도 죄다 할매의 몫이었다. 국가는 섧디섧게 살다 간 시어른이 누워 계신 산소 바로 곁에, 할매가 평생을 거쳐 겨우 마련한 몇 마지기 감나무밭 바로 위에 다시 송전탑을 내리꽂았다. ‘온갖 전쟁 다 겪었어도 이런 전쟁은 없었다’던 할매는 지팡이에 기댄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함께 싸우는 이웃들을 격려했다. 국가가 고약을 떤 자리, 국가가 외면한 자리, 숭숭 구멍 뚫린 삶의 자리를 할매는 그렇게 살아냈다. 의지로, 노래로, 이야기로, 이웃들로 메워냈다. 9년 넘게 이어온 송전탑 반대 싸움의 남은 시간은 할매와 이웃들에게 또 무엇을 요구할까.
“국가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비탄과 분노의 바다에 빠진 요즘, 무능하다 못해 뻔뻔하기조차 한 정부에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승객들이 이미 기울어진 세월호에 몸을 싣는 동안, 정부는 업계의 뒷돈을 받아 챙겼다. 생환 소식을 기다리며 애간장을 끓이고 있는 사이, 정부는 이 틈에 조용히 각종 법령을 통과시켜 잇속을 불렸다. 공청회 없이도 송전탑 건설을 비롯한 전력사업 강행이 가능해졌다. 한 국회의원은 조작된 사진까지 끌어와 세월호 참사 유족을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전문 선동꾼’으로 둔갑시켜 유족과 밀양 주민을 동시에 모욕했다. 세월호와 함께, 진작에 침몰한 국가와 민주주의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 침몰한 국가의 선장은 책임을 떠넘길 대상만 부지런히 찾고 있다. 지금 밀양을 살고 있는 이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국가가 헤집어놓은 또 다른 ‘밀양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국가란 무엇인가 더 이상 묻지 말자. 국가를 묻은 땅에서 삶과 안전이 간신히 시작될 모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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