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를 네가 낳았어? 애를 네가 낳았냐 고?” 어느 아침, 권오철(40)씨의 부서장은 부하 직원을 세워두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독설을 퍼부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린아 이처럼 야단을 맞는 직원은 난산 끝에 아이 를 낳은 아내 곁을 지키느라 평일 하루 휴가 를 썼다가 된통 당하는 중이었다. 지켜보는 권씨 역시 비참했다. 이 우울한 실화는 이른 새벽 별 보고 출근해서 늦은 밤 별 보고 퇴 근하는 샐러리맨들에게는 그저 일상이었다. 직장인을 소재로 한 우스개 질문 중에 ‘불의 를 보면, 나는?’이라는 문항이 있다. 다양한 대답이 나올 거 같아도 매번 답은 하나. “꼭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날 아침이 분기 점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사를 그만둔다. 사 실 오래전부터 외도(?)를 꿈꿨다. 넉넉하진 않아도 사진만으로도 밥을 먹는 꿈. 마음을 다잡기 위해 ‘천체사진가’라는 직업도 스스 로 만들었다.
“천문학을 좋아하긴 했어도 대학 때 전공 할 생각은 안 했어요. 당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공대를 갔죠. 드라마 이 사랑받을 땐데 극 중에 유명 대학 천문학과를 나와서 직업이 백수인 봉 수라는 인물이 있었어요.” 궤도를 이탈한 행 성도 별이건만, 드라마 속 봉수는 천문학씩 이나 공부했어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비 쳤다. 그런 봉수가 짠해 마음이 쓰이면서도 봉수처럼 살 자신은 없었다. 서울대 조선해 양공학과를 졸업한 권씨는 대기업과 벤처기 업에서 잠수함 설계, 소프트웨어 개발, 유· 무선 인터넷 관리 등 다양한 일을 해왔지만 이제는 하늘 보는 일만 하며 절반 이하로 줄 어든 수입에도 마침내 행복하다.
10대 후반, 이태형의 을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면서 별 이름을 모조리 익힌 그는 종이 달 력이 아니라 하늘을 보면서 계절이 어디쯤 왔는지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별을 땄을 것 인데, 누구도 그건 못하는 일이라고들 해서, 아버지의 카메라(니콘F2)를 가져다 쉴 새 없 이 찍어댔다.
더 어릴 땐 새와 곤충을 쫓아다녔다. 새는 특유의 보호색이 있어서 숲에 들면 잘 보이 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는 동물이 천적을 감 지하듯 야생의 눈으로 무엇이든 찾아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가로수에 붙은 매미 의 수를 헤아렸고, 해 질 녘 달리는 차 안에 서도 산꼭대기에 점처럼 달라붙어 있는 수 리부엉이가 눈에 들어왔다. 2천 명이 운집한 어두운 광장에서 뒤통수만 보고서 짝사랑 하던 여자를 단숨에 찾아낸 적도 있다. ‘영 화 속의 구라들’이란 기획으로 에 글을 쓰던 시절에는 영화 의 비 과학성을 파헤쳐 인기를 끌었다. 난파된 배 갑판에 힘겹게 매달린 여주인공(케이트 윈 즐릿)은 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를 본다. 그 러나 그 시간, 그 지역에서 그녀가 은하수를 보려면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한다. 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할 때 “누군가 그 장면의 오류를 지적해서 수정했다”고 제임 스 캐머런 감독이 뉴스에서 말하더라나. 말 은 돌고 돈다더니.
오직 노력이 좋은 천체사진 만든다그러나 제아무리 ‘열린 눈’(開眼)이라 해 도, 믿지 못할 날씨 앞에선 속수무책일 터. 그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건 무엇일까. “오 로지 노력만 믿을 뿐, 우연이나 횡재는 믿지 않아요. 날씨마저도 노력에 의한 확률이 커 요. 표지 사진을 보면 핑 크빛 오로라가 강한데, 제가 오로라 찍은 이 래로 그날이 가장 강한 핑크빛을 보였어요. 사실 그날은 찍을 수 없는 조건이었거든요.
20일 내내 기상이변으로 날씨가 좋지 않아서 이번엔 볼 수 없겠구나, 모두 체념하고 촬영팀 전원이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죠.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결국 혼자 남았어요. 태양이 수상했거든요.” 태양이 수상했다고? 이쯤에서 펼쳐본다. 의 저자 권씨가 들려주는 ‘오로라란 무엇인가’.
태양에서 방출된 전기를 띤 입자들은 지구의 자기장에 이끌려 양 극지방으로 내려오면서 지구 대기와 반응해 빛을 낸다. 대기 중의 어떤 성분과 반응하느냐에 따라 초록색·붉은색·핑크색 등 다양한 색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오로라다. 태양에서 온 전기를 띤 입자들이 대기의 어떤 원소와 반응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빛이 나온다. 밤거리의 네온사인도 빛의 원리는 같다. 형광빛의 거대한 커튼이 너울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오로라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이 신비로워 원주민들에게 ‘신의 영혼’이라 불렸다. 너풀거리는 모습이 치마폭과 비슷해서 ‘여신의 드레스’로도 불린다. 오로라를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캐나다 옐로나이프는 언제 가도 좋지만 항공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9월과 2월이 인기 시즌이다. 공들여 하는 작업이 대개 그렇듯 카메라를 열어두고 무작정 기다리는 일이 때로는 지루할 것도 같다. 남는 시간은 무얼 하며 견딜까 싶은데 한 신 촬영에만 3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총 4대의 카메라를 오가며 세팅하고 거두는 것만도 시간이 빠듯하단다.
“왜 이것밖에… 아쉬움이 나를 움직인다”사진으로만 보아도 이토록 황홀한데, 하늘에서 너울거리는 치마폭을 실제로 본다면 헤어나기 힘들 만큼 좋을 테지. 그러나 봄날은 가기 마련이고, 매혹은 찰나여서 아름다운 법. 홀린 상태로 몇 번 따라다닐 순 있어도 아예 방향을 틀긴 쉽지 않아 보인다. 싫증과 권태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를 몰아세운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을까. “좋은 순간을 너무 많이 봐서 사실 웬만한 걸 봐서는 감응이 없어요. 점점 더 황홀한 순간을 찾는 중독자가 되기도 하죠. 그런데도 이게 끝인가 싶으면 더 극적인 게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요. 이토록 좋은 상황에서 왜 이것밖에 찍지 못했을까, 매 순간 아쉬움이 남고요. 그러니 계속 찍을밖에요.”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 변화로 오로라의 주기나 밝기 등이 영향을 받진 않을까, 혹시라도 오로라를 자주 쬐면 인체에 해롭지 않은지도 궁금해졌다. “인류 역사가 1만 년이 안 됩니다. 지구 은하계에서 태양이 도는데 지구가 1억 년 단위거든요. 지구온난화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고 환경 보존 차원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말도 맞지만, 오로지 인간 활동 때문에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건 다소 오만한 사고가 아닐까요. 인간이 화석연료를 모두 땐다 해도 태양 활동의 1~2%에도 못 미치거든요. 화석연료를 때기 이전부터 온난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어요. 아, 그리고 오로라는 자주 봐도 해롭지 않아요. 하하!”
“아무개가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유를 찾아 떠났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그 말은 어떤 붙박이들의 가슴엔 대못을 치고, 때려치울 직장도 없는 이들에겐 깊은 슬픔을 안긴다. 그러나 누군가 ‘돈벌이를 위한 일(Only for money job)은 이제 그만’이라 선언하고 스스로 길을 내면서 나아가는 걸 보면 나처럼 귀가 얇은 사람은 슬쩍 그 대열에 끼고 싶어서 입맛을 다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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