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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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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보다 더 싫은 건 내 이웃을 잃는 일이야”

호탕하고 부지런한 성정에 일 도맡는 밀양 대책위 총무 김영자씨
군인이 꿈이었던 ‘며느리 5번’의 ‘노놔먹는 삶’ 앗아간 송전탑 공사
등록 2013-09-18 14:42 수정 2020-05-03 04:27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밀양 고정마을에서 자라, 차로 20분 거리인 여수마을로 시집왔다. 한평생 밀양을 떠나본 적 없고, 농사 외에는 지어본 적이 없다. 시골 아낙으로 살아왔다. 특이사항을 붙이자면, 조금 씩씩한 시골 아낙 정도였다. 김영자(56)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농사짓는 사람에게 흔히 묻는 그런 질문을 했다. “무슨 농사를 지으세요?” “오만 거 때만 거 다 지어예.” 내가 못 알아듣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이것저것 다 짓는다는 걸 우리는 그리 말해예.”

“힘들 때 여군 못 간 걸 생각하지”

나도 따라 웃었다. 생소한 말이 재밌기도 했지만, 실은 그녀의 웃는 모습 때문이었다. 어찌나 씩씩하게 웃는지. 아이고야 하며 깔깔거렸다. 오십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무슨 여고생 웃듯이 했다. 목소리도 컸다. 농도 잘했다. 참 씩씩했다. “옛날에 펜팔 하던 게 있는데, 거기다가 ‘언제나 환한 웃음의 소유자로 살겠다’ 글을 쓴 게 있으예. 항상 밝게 호탕하게 사는 게 좋아예.” 그래, 호탕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여장부감이라 해야 하나.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앞장설 것 같은 인상이었다. 실제 그러했다. 부녀회장만 11년을 지낸 경력이다.
그런데 펜팔은 언제 한 것이냐 물으니, 사촌오빠가 군대를 갔는데 선임들이 여동생이 없냐고 물었단다. 여중생이던 영자씨는 친구들과 함께 군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글을 곧잘 썼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하루 일을 정리하면 몇 장씩 써졌다. 그렇게 보낸 편지는 인기가 좋았다.

김영자씨는 송전탑 건설을 막아달라고 국회의원들을 쫓아다니다가 문득 “내가 왜 내 땅에서 살게만 해달라고 이만치 사정을 해야 하나” 화가 났다고 했다.박승화

김영자씨는 송전탑 건설을 막아달라고 국회의원들을 쫓아다니다가 문득 “내가 왜 내 땅에서 살게만 해달라고 이만치 사정을 해야 하나” 화가 났다고 했다.박승화

당시 그녀의 꿈 역시 군인이었다. 여군이 되고 싶었다. 멋져 보이는 제복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한테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예. 나는 그게 참 좋아. 자기 마음만 먹으면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잖아. 그게 좋아예.” 순진하게도, 팔굽혀펴기 열 개만 하면 여군으로 입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밤마다 연습했다. 하지만 여군 지원 조건은 고졸 이상. 여자는 시집이나 가면 된다는 시절, 중학교도 근근이 나왔다. 중학교는 나온 덕에 에이비시디(ABCD)는 안다고 했다. 그런 시절이니, 팔굽혀펴기 열 개를 해도 고등학교를 나와도 군인이 되겠다는 꿈은 펼치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물이 훌쩍 넘어 시집을 갔다. 씩씩하고 대범한 그녀와 달리 곱상한 생김새에 다정한 성격의 남편이었다. 뭐 그런 것 알지도 못하고 시집을 가긴 했다. 얼굴 한 번 보고 어른들 뜻에 따라 한 결혼이었다. “세상을 살며 시집와서 좋고 기쁜 일만 있었겠어예. 힘든 일이 있을 때 항상 그 생각을 잘하지. 여군 못 간 걸 생각하지.”

막상 살다보니 꿈꿀 시간조차 부족했다. 남편은 9남매였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며느리 5번으로 들어왔다’. 다섯째 며느리인 그녀는 큰집에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살았다. 형제자매는 많았는데, 땅은 적었다. 남의 논을 빌려 농사를 지어야 했다. 힘든 살림이었다. 죽어라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쁠 때는 마을 사람들 말대로, ‘네발로 논밭을 기어다녔다’. 흔히 말하듯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했다. 모를 심고 풀을 베고 약을 쳤다. 배 굶고 사는 사람들 이해를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는 두 손을 쉬게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다 하우스 농사를 지으면서 살림이 좀 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하우스 농사를 해서 ‘돈 만든 것’은 영자네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치 부지런을 떨었다. “열심히 둘이 살다보니 살아지드라고예.” 먹고살 만해진 지금, 좁은 집에서 9남매가 북적거리던 그때는 추억이다.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을 되면 감 따서 작업해서 좀 보내고, 점심 먹고는 쉬는 참에 밤을 따서 저녁 되면 한 냄비씩 삶아가지고 식구들끼리 밤 까먹는 게 그게 생활이었어예.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이었지예. 아무리 참 먹을 게 없고 옷 사 입을 돈이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너무 행복했던 거 같아예.”

찢어지고 갈라진 한 동네 이웃들

자신을 닮은 다섯째 며느리를 예뻐했다는 시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철마다 북적거렸던 집도 조용해졌다. 이제는 남편과 잠시 내려온 아들 하나가 집을 지키고 있다. 그리 살며 나이를 먹고 ‘나 많은 사람’(나이든 사람)이 될 것 같았던 인생은, 2005년부터 달라졌다. 한국전력이 밀양을 765kV 송전탑 건설 부지로 선정한 것이다. “애들도 커가고 다들 결혼도 하고 또 세월이 흐르다보니께, 이렇게 송전탑이라는 걸 만나가지고. 그때부터 인생이 엉망 되기 시작한 거라예.”

처음에는 전봇대 같은 것이 들어오나보다 했다. 그런데 크기가 도시의 고층 아파트 2개를 이어붙인 것만 하다고 했다. 거대 송전탑이 마을 뒷산에, 논밭에, 학교 뒤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초고전압 송전선에서 나오는 전자파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은 병들어 죽고, 가축은 살이 붙지 않고, 꽃은 수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니 땅값이 똥값이 됐다. 현금을 쥘 수 없는 농민들에게 다음해 농사 자금은 다 빚이었다.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야 다음해 농사를 짓고, 애들 학비를 보태고, 아프면 병원도 가는데, 농협은 송전탑이 들어서는 땅이라며 대출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자산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마을이 술렁거렸다. 영자씨도 반대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성명서를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난리 브루스’를 췄다. 그럼에도 송전탑 공사는 진행됐다. 전원개발촉진법이라고 그런 법이 있다 했다. 터 잡고 사는 사람 의견은 하나도 반영 안 해도 송전탑 공사가 가능한 법. 법조차 자신들의 편이 아니자 주민들은 맨몸으로 공사를 막기 시작했다. 장정 걸음으로 40분, 허리도 못 펴는 ‘나 많은 사람’ 걸음으로는 2시간이 될지 3시간이 될지 모르는 산길을 매일 오르내렸다. 산 위에 포클레인이 놓였다. 송전탑 공사를 위해서다. 70~80살 되는 마을 노인들이 포클레인 앞에 주저앉기 위해 산을 올랐다.

한전에서 공사를 강행한 지난 5월은 농사철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특히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논에 물을 대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 일손을 놓고 산에 올라와 있으니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렇지만 송전탑을 막지 못하면 다음해 농사도 그 다음해 농사도 책임질 수 없다. 고추 휜 것조차 먹지 않으려는 도시 사람들이 전자파 아래서 기른 고추를 먹으려 할까. 그래서 산에 올랐다.

화가 났다. 송전탑 막아달라고 국회의원들을 쫓아다니다가 문득 내가 왜 내 땅에서 살게만 해달라고 이만치 사정을 해야 하나 화가 났단다. 송전탑 건설이 결정된 뒤로는 화날 일투성이다. 그중 제일 화나는 것은 매일 함께 밥 먹고 술 먹고 지내던 주민들이 한전에 의해 갈라치기 당하는 일이다. 마을 대표부터 회유하려는 한전 때문에 여럿 마을에서 이장이 쫓겨나거나 얼굴을 붉혀야 했다. “지는 송전탑이 들어왔음 왔지, 내 이웃 잃는 일은 싫어예.” 평생을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제일 피하고 싶은 일이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금도 눈뜨면 밭에 나가고 달이 떠야 집에 돌아온다. 그럼에도 틈틈이 작게 깨도 심고 복수박도 심는다. 할매들처럼 쉬지 못하고 일한다고 타박도 받지만, 그래도 이웃 사람들과 뭐라도 ‘노놔(나눠) 먹고 싶어’ 그런단다. 그런 이들이 찢어지고 갈라진다. 못 볼 꼴이다. 하지만 싸움은 사람을 가르기만 하지 않는다. 평생을 밟아온 땅에서 결국 주민들과 함께 해야 하는 싸움이다. 답답한 속을 나누는 이도 이웃이다.

이것도 추억, 송전탑 막아낸다면

“고추를 따다가도 송전탑 이야기를 한다는 그예. 하다가 답답하면 사람들하고 막 ‘송전탑 물러가라’고 고함을 지르고. 고추 따는 사람이 ‘물러가라! 백지화하라!’ 하거든예. 그래 해놓고 파르르 웃으예. 왜 웃느냐 하면, 밖에서 이 소리를 들음 저희네들이 송전탑 막는다고 뛰어다니더니만 틀림없이 다 미쳤다 하겠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파르르 웃는 그예.“

조용했던 마을이 소란스럽다. 가족 친지가 많아 북적거리던 가난한 집이 그래도 재미났다는 5번 며느리는 이제 부산해진 밀양 여수마을에서 ‘765kV 송전탑 건설 반대 대책위원회’ 총무를 맡아 뛰어다닌다. 그래, 이것도 다 추억이 될 것이다. 송전탑을 막아낸다면.

희정 제2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


*‘2013 만인보’ 연재를 마칩니다. 3년여 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들과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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