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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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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낮고 미더운 한의원을 아시나요

양심적이고 착한 진료로 유명한 서울 시흥동 경희태평한의원 박상연 원장
자신 먹여살려준 동네를 위해 훗날 복지센터 짓고 싶다는 한 ‘심의’의 꿈
등록 2013-05-11 18:06 수정 2020-05-03 04:27

“양의는 훌륭한 진단기계를 많이 갖춰야 하고 약품도 대규모 설비로 제제해야 하므로 돈이 많지 않으면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의는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치료도 하등의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민중의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진료는 일종의 위로 과정이다

지난 4월30일 오전 경희태평한의원 박상연 원장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아픈 이웃들의 주치의가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그는 말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지난 4월30일 오전 경희태평한의원 박상연 원장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아픈 이웃들의 주치의가 되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그는 말했다. 한겨레 정용일 기자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던 조헌영(1900~1988) 선생은 1935년 에 양의와 한의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상업화로 치닫는 오늘의 의료 현실에서 그 어떤 의학도 ‘민중의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양의와 한의를 떠나 약한 이웃들이 기댈 병원과 의료인이 많지 않은 탓이다. 마실 가듯 들러 건강 상담을 하고, 이런저런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문턱 낮고 미더운 병원을 찾아나선 건 그래서다.

서울 시흥동 경희태평한의원을 찾은 지난 4월30일, 박상연(43) 원장은 마지막 내원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환자가 물러간 저녁에 찾아오라 했던 차였다. 진료시간은 온전히 환자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그의 병원은 환자 1명당 진료시간이 20~30분에 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저는 한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행위를 일종의 위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을 치료하기에 앞서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어주는 일에서 진료가 시작되니까요.” 몇 시간 기다렸다 3분 진료받고 나오는 대학병원이나, 심지어 환자 5명을 동시에 진료한다는 ‘명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의 ‘원칙’은 도드라져 보였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움도 많을 듯싶었다. “아무래도 돈을 생각하면 많은 환자를 보는 게 좋겠죠. 쉽게 빨리 버는 의사들에 비해 천천히 버는 편이니까요. (웃음) 하지만 이 길이 맞다고 봐요. 출산을 해서 지금은 쉬고 있는 아내도, 같은 일을 하거든요. 사실 둘이 벌어서 먹고살 만하니까 그러는 것도 있어요. (웃음)”

형편이 안 되는 환자에게 굳이 보약을 권하지 않고, 보약을 짓더라도 가격대를 다양하게 해서 환자들의 부담을 줄이는 등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병원 운영을 고집하는 그가 한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원래 의학을 제대로 해볼 생각에 생명과학과에 진학했어요. 생물학부터 한 다음에 미국 의대로 유학을 가자고 맘먹었거든요. 그러던 중에 죽염 개발로 유명한 인산 김일훈 선생의 책을 읽고 한의학에 눈을 뜬 거예요. 민중을 위한 의술을 펼친 그분의 삶을 보고 한의학의 매력에 빠졌죠. 그래서 다시 수능을 봐서 한의대에 갔어요.”

지금은 쉽게 말하지만, 그가 한의대에 진학한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살인적인 생명과학과 공부 틈틈이 수능 공부를 병행하던 1993년, 입학 정원을 두고 전국의 한의학계와 약학계가 대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한의대 입학 정원 축소로 귀결됐고, 그는 끝내 고배를 마셨다. 정원이 줄지 않았으면 합격할 점수였다. 경희대와 자신이 다니던 포항공대를 동시에 붙은 합격생이 경희대를 포기하고 포항공대에 지원한 까닭에 예비합격 1위까지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3위였던 그는 운이 없었다.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님을 그때 알았어요. 이듬해에 결국 한의대에 들어갔는데 가서도 한 번 더 약학계와 분쟁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의 수업을 안 했거든요. 예과 1학년 때인데, 한 1년을 원없이 놀았죠. 하루에 14시간씩 자고. 생명과학과에 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웃음)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보고 철학 공부도 하고 좋았죠. 1년을 버렸지만 더 많은 걸 얻은 시간이었어요.”

“이 동네의 주치의로 살고 싶어”

그 시절을 야무지게 놀았기 때문일까. 이후 그는 늘 공부를 이고 살았다. 원광대 한의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했고, 최근에는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문학과 학부과정을 이수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학위를 준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한 번 더 태어나서 한의학을 공부하면 그땐 좀 알 것 같다고. (웃음) 그런 거 보면 인간의 몸은 소우주가 아니라 대우주인 듯싶어요. 영어를 공부하게 된 것도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들을 꿰차고 있으려면 영어 실력이 긴요해서예요. 물론 인문학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요. 인문학도 공부를 하니까 재밌더라고요.”

낮에는 환자들과 씨름하고 저녁에 책을 들여다보는 삶을 살다가, 최근에는 갓난아기인 둘째를 돌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는 그. 매일 놀아도 또 놀고 싶은 난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는 사진이 취미였어요.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사진을 찍어줬거든요. 필름 한 통을 다 찍으면 한두 장 건지는 재미로 찍었죠. 요새는 오디오에 꽂혔어요. 오디오에 미치면 집안 망한다는데,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나 저렴한 가격에 스피커와 오디오를 장만했죠. 집에서 음악 듣고 가끔 헌책방을 다니며 그러고 놀아요. 물론 가끔 친구를 만나 술도 세게 마시죠. (웃음)”

선배 한의사의 일을 도우며 자리를 잡게 된 이 동네에서 그는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진료 잘못하면 찾아와서 항의할 곳이 있어야죠. (웃음) 이 동네 어르신들과 정이 많이 들었어요.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갖다주시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저를 먹여살려준 동네인데 돈 벌었다고 다른 데로 ‘먹튀’하면 안 되잖아요. 이 동네의 주치의로 살아야죠.”

정년이 없는 전문직이지만, 그는 환갑이 되면 일을 접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능력 있는 후배들이 자리를 잡고 한의학이 더 발전하지 않겠느냐는 것. ‘인생 이모작’과 관련된 그의 구상을 들어봤다. “이 동네를 위해서 뭔가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 돈이 모인다면 복지센터 같은 걸 짓고 싶습니다. 아내와도 합의했거든요. 1~2층은 육아나 탁아 시설을 짓고, 3~4층은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을 열고 싶어요. 근처 서울대생의 재능을 기부받아 강의를 맡기면 되지 않을까요.” 그는 사람 너머 사회를 치료하고 싶은 것일까.

가정환경의 차이가 균등하게 교육받을 기회의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 데는 본인의 넉넉지 못한 성장 배경도 영향을 끼쳤다. 지금의 삶은 가난한 집안에서 부지런히 공부한 그의 노력 덕분이겠으나, 그는 생의 고비마다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이름들을 잊지 못한다. “제가 인복이 많거든요. 학교 다닐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분들 덕분에 지금 제가 있는 거죠. 이 동네의 아이들도 나처럼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으면 해요. 복지센터가 그 만남의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덟 가지 의원 중 으뜸인 ‘심의’

그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오래된 책의 한 구절을 찾아 읽었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말한다. “여덟 가지 의원 중 그 제일을 심의(心醫)로 친다. 심의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로서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하여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이은성, 소설 1권) 문의 02-895-1075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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