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으로는 봄이지만 아직 봄이 되지 못한 시간, 꽃망울이 필까 말까 하는 그 시간 속에서 한적한 길을 따라 서울 도봉구 창동 도봉어린이문화정보센터(도봉아이나라)를 찾았다. 지역에서 ‘왕언니’로 통하는 한 ‘아줌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 8평 컨테이너에서 시작해 29평 동네 상가 건물의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다 지금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번듯한 공공도서관 관장이 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역의 주인은 아줌마다
도서관에 들어가니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의 엄마들에게 말을 건네고 열심히 말을 듣는 이가 있다. 개관 5주년을 맞아 도서관 이곳저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왕언니’ 이순임(49) 관장이다.
현재의 어린이도서관장 자리에 오기까지 그녀의 인생을 변모시킨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도서관 한편의 독서토론실에 앉자마자 가장 먼저 그 시작점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20년 동안 아이 낳고 생활하다보니 내 능력, 관심, 존재의 의의에 대한 의문이 마흔쯤에 찾아왔어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잘’ 살아왔는지 의문이 들었고, 뭔가 사회에서 도태된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사실 지역활동·지역사회라는 단어에는 먼저 아줌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지역의 주인은 아줌마입니다. 오래도록 지역에 머무르고, 지역 현황에 대해 가장 민감하고 밀접하게 느끼는 것이 아줌마예요. 그런 아줌마들의 능력을 지역사회에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란 고민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데서 출발한 서울 도봉구의 작은 독서 모임은 어쩌면 도봉구였기에 가능했고, 또 도봉구였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을 가졌지만 그만큼 문화·교육적 측면에서는 열악한 곳이 도봉구다. “저는 도봉구를 도봉리라고 불렀어요. (웃음) 그만큼 자연을 보고 이곳에 온 거죠.” 이순임 관장은 아이 다섯을 낳았다. “다섯을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웃음) 하지만 품앗이 교육이 가능했어요. 단순히 학교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연 속에서, 돈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가족으로 살아볼 수 있었어요. 도봉산 자락에서 아이들과 먹고 자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죠.”
이야기는 자연스레 엄마와 아이가 함께 책을 읽는 북스타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북스타트가 결국 ‘사회적 육아운동’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북스타트가 단순히 얼마나 많은 책꾸러미를 주고 얼마나 많은 엄마가 참가했는지 등의 결과보다는 이런 활동을 통해 아이 엄마도 성장하고 함께 학습하는 데 중점을 두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의 이해,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도서관, 자신의 능력 펼칠 수 있는 장열심히 도서관 운동을 펼치고 다방면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치기도 하는 일에도 관성이 생길 무렵, 머리를 해머로 치는 듯한 충격을 받은 일이 생겼다.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있는 한 센터에서 책 읽어주는 봉사를 하던 때였어요. 책을 읽어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눈망울을 또랑또랑하게 빛내며 내용에 집중하지만 이 친구들은 혼잣말하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똑같은 책을 열 번이나 읽어줘야 하는 등 정말 힘들었어요. 이런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봉사를 그만두려 할 때 어느 날 그곳 선생님이 더 이상 같은 책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어요.” 아동 도서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그 책을 왜 읽지 말라고 했을까. “책을 읽어준 그 주에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잔치를 벌였대요. 그때 확 깨달음이 왔어요.” 외부의 인정과 칭찬만을 기대했고 자신의 활동이 인정받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려 했던 자신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것 이전에 그 친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고, 그다음부터 그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영혼에 대고 진실된 사랑을 준다는 느낌으로 다가갔다. “그때 나 자신에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자원봉사를 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참 많이 던졌어요. 그 계기로 마음이 편해졌어요. 겸손해지고 사람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고 조금 철이 들었다고 할까요. (웃음)”
그렇게 도서관에서 책을 곁에 두고 오랜 시간을 보낸 그녀에게 도서관이란 공간은 어떤 의미일까. “결국 도서관도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안의 도서관, 이런 것에 도서관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곧이어 어린이도서관에 대해서도 그녀의 설명은 이어졌다. “어린이에만 방점을 찍다보면 사교육·학습 쪽으로 치우칠 수 있어요. 지혜라는 부분으로 가려면 다른 측면의 접근이 필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다양한 교육·문화·예술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정도가 도서관 직원이나 저 같은 관리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서관의 프로그램은 지역 사람들이 와서 함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열고 있어요.”
실천적인 활동이야말로 중요하다요즘 협동조합에 관심이 많다던 그녀는 공부도 좋고 책 읽기도 좋지만 실천적인 활동이야말로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초록나라라는 작은도서관을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인데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경험도 없고, 멘토는 더욱이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바로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이었네요. 함께 어떻게 잘 살 수 있는지 이기심을 넘어, 자기중심주의를 넘어 협동해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를 지향했던 것이 여전히 맞구나. 많은 이론가가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은 다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있는 요즘입니다.”
언젠가 도서관을 떠나게 될 때 뒤에 오는 사람들이 자신처럼 외롭고 힘들지 않도록 선배의 기록물을 남겨 그것을 통해 도약하고 진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녀의 끝없는 에너지가 마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글 윤성훈 제4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자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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