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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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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도 경호해주고픈

사람을 보호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는 설악시큐리티 임성준 대표 “배우 경호하면 배우 팬도 함께 경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해”
등록 2013-04-13 10:27 수정 2020-05-03 04:27

레드카펫 위를 걷던 여배우가 환호하는 팬에게 눈인사를 하다가 발을 헛디뎠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순간 한 남자가 달려오더니 그녀를 잡아준다. 그녀를 쭉 지켜보고 있던 그는 도열한 ‘맨인블랙’ 중 한 명인 임성준(36)씨. 그는 올해로 경력 13년차의 베테랑 경호원이다.

“이 사람 괜찮겠다는 느낌이 와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의뢰인에게 보낼 수 있겠어요.” 설악시큐리티 임성준 대표가 경호원을 뽑는 기준이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이 사람 괜찮겠다는 느낌이 와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의뢰인에게 보낼 수 있겠어요.” 설악시큐리티 임성준 대표가 경호원을 뽑는 기준이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주말 근무, 규율 엄격하나 이직률 낮아

술을 잘 못 마시고 말주변이 없는 남자가 환영받을 만한 직업군은 흔치 않았다. 그는 오래 고민했고 마침내 경호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정치인·사업가·일반인의 곁에, 혹은 분쟁이나 갈등이 있을 만한 곳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그를 케빈 코스트너처럼 간지 작렬인 ‘보디가드’로 보거나 험한 꼴을 정리하는 ‘해결사’로 보기도 한다. 그가 진짜 하는 일은 뭘까.

“주로 영화인 경호를 합니다. 다른 직업과 달리 주말에 못 쉬고요. 지난주엔 무대 인사차 지방에 다녀왔습니다.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극장이 10군데 정도인데 정해진 시간 안에 움직이므로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뭘 하는지 물으니 다시 일과 관련된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늘 깔끔하게 보여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씩 이발하고,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그는 합기도·유도·태권도 유단자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짧게라도 운동을 한다.

‘각’ 잡고 서 있는 모습이 폼도 나고 좋아 보여선지 경호원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주말에 못 쉬고, 월급도 그리 많지 않고, 규율도 엄격한 편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으며 처음엔 하지 말라고 권한다. 그래도 하겠다고 버티면 최대한 편하게 대하면서 면담도 길게 하고 함께 밥도 먹으면서 이른바 ‘생활’ 속에서 사람 됨됨이를 본다. “이 사람 괜찮겠다는 느낌이 와야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의뢰인에게 보낼 수 있겠어요.” 그 덕에 임성준씨 회사는 이직률이 높지 않고 경호원 모두가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

지금껏 지켜본 배우 중에 누가 가장 멋있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 멋있다고 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그러지 말고 한 명만 말해보라 하니 실명은 거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요구 조건은 일단 접수하고, 그의 말을 좀더 옮겨보겠다. “원○, 강동○, 조인○, 송중○ 중에서 가장 멋진 분을 어떻게 고르겠어요. 빈말이 아니고 다 멋집니다. 남자가 봐도 정말 멋지니까요. 처음엔 같이 서 있으면 사진도 찍히고 좋았는데요, 지금은 솔직히 옆에 서지 않으려 해요. (웃음) 일이 되고 보니 나중엔 좀 덤덤해지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태에 민감

배우를 직접 보는 팬들의 반응은 익히 짐작되지만 그걸 방어(?)해야 하는 경호는 얼마나 진땀이 날까. “팬들의 반응은 서울과 지방이 많이 달라요. 지방 사람들은 아무래도 연예인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흔치 않아선지 좋아하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든요. 그래서 서울에 비해 경호 인력도 두 배 이상 투입됩니다. 반면 서울 사람들은 배우와 약간 거리감을 유지하는 척해요. 배우의 신변 보호 때문이니 길 좀 비켜달라고 양해를 구하면 ‘뭐야, 원빈이 뭔데! 왜 가는 길을 막아’ 그래놓고 보면 뒤에서 혼자 사진 찍고 있어요. 어떤 분은 ‘뭐야, 유명하면 다야, 쳇’ 도도하게 지나가다 배우가 가까이 가면 ‘어머, 누구다’ 꺅 소릴 지르죠. (웃음) 재밌어요.”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도 물었다. “강동원씨와 부산에 갔을 때예요. 남포동 대영극장에서 무대 인사를 마치고 부산극장으로 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왔어요. 뚫고 가려는데 덩치 좋은 여자분이 앞사람을 밀었어요. 그러자 앞사람이 넘어지면서 결국 강동원씨도 넘어졌죠. 근데 이분이 일어나자마자 팬을 먼저 일으켜세우면서 다치지 않았느냐고 걱정하는 거예요. 놀랐어요. 배우들은 예절 교육을 따로 받나 싶을 만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깊더라고요.” 그러나 의심이 많은 나는 선뜻 믿지 못했다. ‘혹시 몸에 밴 쇼맨십은 아닐까요?’ 물으니 그는 정색했다.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배우가 팬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면 저희도 팬에게 더욱 조심스럽게 대하게 됩니다. 배우를 경호하고 있지만 배우의 팬도 함께 경호하고 있다는 걸 몸으로 알려주는 거죠. 많이 배웁니다.”

누군가를 매 순간 지켜보는 일, 솔직히 힘들지 않을까. “일을 즐겨야 해요, 안 그러면 못하죠. 좋아하지 않고 자부심도 없다면 오래 못합니다. 저 문 앞에서 10시간 동안 누군가를 지키고 있으라면 지킬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내가 왜 여기서 이 문을 지키고 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면 못하는 거죠.” 그렇다면 자부심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인터뷰 시작 전, 그는 자신이 말수가 적어서 이 인터뷰를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런 그가 느리지만 차분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신변을 지키고 있다, 한 생명을 지키고 있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그게 자부심이에요.”

경호 초년에는 이른바 ‘후까시’를 잡았다. 칼주름이 선 양복을 입고 의뢰인을 보호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신경질이 났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볼멘소리도 했다. 아무 때고 사인 받아달라는 지인도 많아서 처음엔 창피하고 ‘가오’도 안 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르면 어쩔 수 없지만 알면 화장실이 어딘지 알려주고, 배우들의 동선과 짬을 보고 사인해달라고 종이도 내민다. 시간과 경험이 가져다준 여유다.

늘 사람들에 에워싸여 있다보니 쉴 때는 거의 집에만 있는데 간혹 밖에 나갈 때는 등산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다. 아마도 직업병일 텐데, 걷다가도 늘 사방을 주시하거나 운전할 때는 따라오는 뒤차가 없는지 살피고 번호판도 확인한다. “오래 하다보니 사실 볼 꼴, 못 볼 꼴 다 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의뢰가 들어오면 해야 하니까요. 그럴 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부리는 자와 부림을 받는 자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배우도 주연과 조연이 받는 조명이 다르잖아요. 너무 지쳐 있는 배우를 보면 저도 모르게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렇게 예민한 그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태에 민감하고 눈치가 무척 빠르다고 한다. 그와 마주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 것 같은지 물었다. “제가 뭔가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시는군요.” 그의 예민한 더듬이는 모든 순간 거의 정확히 작동하고 있다.

“여자친구는 VVIP죠”

인터뷰는 해 지기 전에 끝났다. 여자친구 사귄 지 4개월, 그는 목하 열애 중이다. 모처럼 일찍 끝났는데 데이트는 없을까. “여자친구는 VVIP죠. 무척 긴장해야 해요. 오늘은 인터뷰하느라 에너지를 다 썼으니 좀 쉬어야 해요.” 나중에 경호원 부를 일이 있으면 싸게 해줄 테니 찾아오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의 경호를 받으면 걱정이 없겠다는 믿음을 그는 2시간 만에 상대에게 심어줬다.

글 김민아 제4회 손바닥문학상 수상자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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