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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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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닮은 여자 물을 닮은 남자

펜션 ‘산을 닮은 집’ 운영하며 물 흐르듯 사는 김욱철·최영자 부부
바람처럼 전국 떠돌던 남자와 대학원생 여자는 어떻게 하나가 됐나
등록 2013-08-21 10:44 수정 2020-05-03 04:27

산을 닮은 부부는 다섯 칸 나무집에 산다. 집 이름도 ‘산을 닮은 집’. 줄여서 ‘산집’이라 한다. 집 모양이 뫼산(山)자를 닮아 안주인 최영자(46)씨가 붙인 이름이다. 거실과 주방, 살림집을 겸한 본채 양옆에 작고 큰 방 두 개씩을 나란히 이어 붙였다. 집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바깥주인 김욱철(47)씨가 했다.

범상찮은 인생 경험에 끌려

테라스에 앉아 앞쪽을 바라보면 검붉은 직벽이 시선을 압도한다. 도끼로 찍어낸 듯 아찔한 부벽준의 돌벼랑을 이곳 사람들은 ‘뼝대’라 부른다. ‘바위로 이뤄진 높고 큰 낭떠러지’를 이르는 강원도 지역 방언이다. 부부가 신혼의 보금자리로 이곳을 낙점한 것도 옥색의 물빛과 어우러진 뼝대의 장쾌한 풍광 때문이었다.

‘산을 닮은 집’ 테라스에 앉은 김욱철·최영자 부부. 그들은 “굳이 뭘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계곡물처럼 흐름에 맡겨 사는 삶이 좋다”고 말했다.

‘산을 닮은 집’ 테라스에 앉은 김욱철·최영자 부부. 그들은 “굳이 뭘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계곡물처럼 흐름에 맡겨 사는 삶이 좋다”고 말했다.

부부는 2007년 이곳 덕산기 계곡에 정착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덕우리에 속한다. 황기밭이 있던 계곡 사면을 깎아 다지고, 협곡 자갈길을 따라 목재를 운반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었다. 집짓기가 본격화되자 직장 생활을 하던 여자가 40년 서울살이를 접고 내려왔다.

“말 그대로 함바집 아낙이 필요했던 거다. 장정 대여섯이 먹을 밥을 끼니마다 조달했는데, 밥 시간과 양을 항상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평생 들을 구박을 그 몇 달간 다 들었다.” 여자가 눈을 흘기자 너털웃음을 짓던 남자는 말없이 뼝대만 바라봤다.

두 사람은 2004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모교인 연세대에서 뒤늦게 사회학 석사과정을 밟던 여자가 카페를 하던 지인의 부탁으로 주문진에 내려왔다. 여름 한철, 아침잠 많은 주인 부부를 대신해 오전 시간에 가게를 봐주고 오후엔 조용히 책 읽을 요량이었다. 그 무렵 남자는 카페 옆 빈터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5년간 산장을 지키다 내려온 뒤 덕산기의 빈집에 살림을 부려둔 채 바람처럼 전국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포장마차가 끝나고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데, 나이도 비슷해 뵈는 서울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와서 술 한잔 해요’ 하고 수작을 걸었더니 ‘됐어요. 아저씨들끼리 드세요’ 하는 거다. 참 재수 없었다.”

하지만 냉랭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범상찮은 인생 경험을 능란하게 풀어내는 남자의 이야기꾼 재능에 여자가 조금씩 무장해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살면서 그런 사람 처음 봤다. 뱀사골에서 산장지기 하던 이야기부터 스님·신부님과 새만금 삼보일배를 하던 이야기, 백두대간 종주 이야기,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괴짜 친구들 이야기까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 남자와 가깝게 지내면 인생 지루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이 끝날 즈음, 누군가의 제안으로 카페 일당과 포장마차 패거리가 남자의 덕산기 집에서 ‘쫑파티’를 열었다. 여자는 그곳에서 남자의 다른 면모를 봤다. 사람들이 불편할세라 음식과 입을거리, 잠자리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남자의 세심함에 자꾸 마음이 끌렸다.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든 뚝딱 만들어내는 비범한 손재주도 ‘함께 살 여자 굶길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판을 벌이면 어떻게든 일은 풀려”

여자는 카페 일행이 주문진으로 돌아간 뒤에도 함께 간 여자 한 명을 꾀어 보름을 더 남자 집에서 눌러앉았다. 떠나는 날 남자는 원주 터미널까지 여자를 배웅했다. 여자는 마음이 쿵쾅거렸다. “그 상태로 서울행 버스를 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확 지금 불어버릴까?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카페 언니한테라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생각에 다시 주문진행 차표를 끊었다.”

주문진 가는 길, 대관령 고개에는 가을이 성큼 내려와 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학원 개강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그날 밤 여자는 대취했다. 주문진과 덕산기에서 보낸 여름 한철이 꿈인 듯 그렇게 저무는 듯했다. 이튿날 눈을 떴을 때 여자는 놀랐다. 말쑥하게 수염을 깎은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주문진에 가겠다는 얘길 듣고 눈치챘다. 이 여자, 날 좋아하는구나.” 덤덤하게 10년 전을 회상하는 남자를 곁눈질하며 여자가 말했다. “그땐 정말 소년 같았는데….”

결혼은 2006년 가을에 했다. 결혼하자는 여자의 말에 남자가 조건을 달았다. “매달 10만원씩 용돈 줘. 안 주면 결혼 안 해.” 서울 방배동 여자 집에 첫 인사를 가던 날, 남자는 등산복을 입었다. 가진 옷 중에 상태가 가장 양호한 옷이었다. 사윗감의 차림새를 본 노부모가 여자를 조용히 불러 돈을 쥐어주었다. “이건 경우가 아니다. 옷 사 입혀 다시 와라.” 정장을 입고 돌아온 남자에게 노부모는 물었다. “그래, 뭘 해서 먹고살 건가.” 남자는 말이 없었다. 여자가 끼어들었다. “펜션 하면 되지. 이 사람, 정선에 집도 있어.”

말이 씨가 됐다. 2007년 부부는 은행 빚을 내 지금의 산집 터를 사들였다. 집을 짓겠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남자의 형·동생들이 모여들었다. “경험이라곤 목조주택 시공하는 후배를 따라다니며 몇 번 도와준 게 전부였다. 그래도 불안하진 않았다. 일단 판을 벌이면 어떻게든 일은 풀렸으니까.” 설계를 하고 견적을 뽑고 설비와 공구와 목재를 사들였다. 6개월 만에 상량을 했다. 동생들을 보낸 뒤 가까운 형과 둘이서 마무리 공사에 매달렸다. 이듬해 봄, 히말라야 로지를 닮은 나무집이 완성됐다.

민박업은 생각만큼 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첫 1년은 주변의 다른 민박집에서 소개를 받아온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2009년 빨치산 다큐멘터리를 찍던 조성봉 감독이 다녀간 뒤 인터넷에 산집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남자와 알고 지내던 조 감독이 강력한 팬덤을 거느린 파워블로거였던 것이다.

산집이 입소문을 탄 데는 투숙객에게 내놓던 커피 맛도 한몫했다. 부부가 직접 볶은 원두를 갈아 내린 것이다. 커피 맛을 못 잊어 산집을 다시 찾는 투숙객이 적지 않다. 얼마 전엔 지인과 함께 정선 읍내에 티쓰리(T3)라는 로스팅 하우스를 냈다. 6kg짜리 로스터기도 들여놓았다.

“휴가철이 지나면 산집을 찾는 발길이 거의 끊긴다. 계곡 물이 얼어붙고 새·벌레 소리마저 끊기면 적막뿐인 이곳이 딴 세상 같다. 뼝대를 마주 보고 도 닦을 심사가 아니라면 뭔가 집중할 일이 필요하다.”


좋은 풍경 나누며 사는 것

남자가 수년 전부터 커피 로스팅에 몰두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동안은 대가들을 사숙하며 나만의 공력을 쌓는 기간이었다. 기운이 무르익었으니 이제 강호로 출사할 때가 됐다.” 여자의 꿈은 한결 소박하다. 혼자 누리기 아까운 덕산기 풍경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다. “이 남자랑 결혼하면 굳이 뭘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았다. 학생운동을 하고, 출판사를 다니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할 때도 뭔가를 항상 앞서서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남편이 그걸 깨버렸다. 계곡물처럼 흐름에 맡겨 사는 것, 좋지 아니한가.” 산을 닮은 집 033-563-3102.

정선=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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