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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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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선생님

보기 드문 철학대안학교인 광주 ‘지혜학교’ 철학 교사 양진호씨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치유돼가는 기타리스트 출신 선생님의 꿈
등록 2013-03-03 14:07 수정 2020-05-03 04:27

철학 시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 데카르트의 을, 영어 시간엔 신경숙의 영역본을, 역사 시간에는 김구 선생의 를 읽는 학교. 20세기 대중음악을 배우는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기타와 드럼으로 연주하는 학교.
언뜻 대학 학부생 수준에 맞을 듯한 강의가 이뤄지는 곳은,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철학대안학교 ‘지혜학교’(www.sophiaschool.or.kr)다. 이 지역의 유일한 대안학교인 지혜학교는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으로 2010년에 개교했다.

좀더 즐겁고 재미있는 철학 수업을 준비하느라 양진호 선생님의 겨울방학은 여전히 분주하다. 지난 2월19일 저녁, 철학교육연구소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 오승훈 기자

좀더 즐겁고 재미있는 철학 수업을 준비하느라 양진호 선생님의 겨울방학은 여전히 분주하다. 지난 2월19일 저녁, 철학교육연구소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다. 한겨레 오승훈 기자

역사·문학·예술에 철학 접목한 수업

지난 2월19일 해 질 녘, 지혜학교로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등굣길의 황룡강변이 노을로 반짝였다. 교정에는 학생들이 없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 120명이 방학을 맞아 모두 집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적막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남아 늦도록 새 학기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명 철학(Philosophy)에서 따왔을 ‘지혜’(Sophia)라는 이름은 이 학교의 지향이 다른 대안학교와 다르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앎이라고 봅니다. 인류의 생각이 깃드는 장소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이고요. 지혜학교는 참생각이 깃드는 그 장소가 나 자신임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자신을 알 때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잖아요. 남을 다스리지 않고 자유롭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아무한테도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더불어 배우는 곳이 지혜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교사이면서 법인 부설 철학교육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양진호(42) 선생님이 말한 지혜학교의 설립 목적이다. ‘아무도 다스리지 않고 아무한테도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라니 일성부터 철학 선생님의 ‘포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사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노예가 아닌 주인의 삶을 산 것은 맞다. 그렇다고 누구나 철인(哲人)이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철학 과목이 국민윤리의 하위 파트너이거나 국·영·수의 보충수업에 불과한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철학 교육이란 일견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철학 교육이 뭐 거창한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체육 시간에 몸의 근육을 키우듯이 철학 수업을 통해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거죠. 대중도 그렇지만, 특히 몸과 마음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청소년에게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니까요.” 이는 곧 공교육 과정에서도 철학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철학 교육을 문의해오는 학교들이 있는데요. 철학 수업 몇 시간을 하면 학교폭력이 근절될 것처럼 생각하더라고요.” 평상시에는 인문학 교육을 등한시하다가 일만 벌어지면 임시방편으로 삼는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몸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 고되듯,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라고 쉽지는 않을 터. 하물며 모든 학문의 시원인 철학이라면 그 공부가 어렵지 않을까. “어렵죠. 세상에 쉬운 건 없잖아요. 그렇다고 어렵게만 가르치면 저희들도 어렵거든요.(웃음)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난이도가 달라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죠. 저학년의 경우 직접 철학을 가르치기보다는 독서와 인문, 예술, 체육 과목들이 중점적으로 학습되고, 고학년으로 가면 그동안 배웠던 것들에 철학적인 내용을 접목하는 통합교과수업이 진행됩니다. 예컨대 한말 개항기 역사를 가르치며 동도서기론 등 그 시대의 철학적인 고민들도 아울러 배우거나, ‘자유의 역사’를 배우며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다양한 사상들과 함께 그 시대의 음악을 학생들이 직접 연주해보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빈 공간을 남겨놓고 팀티칭 형식으로 철학·역사·문학·예술을 엮어서 이 시대의 물음이 무엇이었고, 철학자들은 그 물음에 어떻게 답했는지 배우는 것이죠. 6학년들하고는 제가 번역한 데카르트의 을 읽었고요.(웃음)”

유년기 밴드 활동이 되레 학생과 교류 넓혀

갑자기 늦깎이 공부를 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양진호 선생님은 무엇보다 중요한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늘 새롭고 재미있는 교습법을 궁리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일하는 철학교육연구소는 이런 고민을 덜기 위해 학교가 지난해 설립한 곳이다. 철학대안학교인 지혜학교에 걸맞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철학 교육 방법을 모색하고 그 결실을 지역사회와 나누기 위한 싱크탱크다.

사실 그가 이 학교에 온 것은 일종의 운명에 가까웠다. 2000년부터 4년 동안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대중과 청소년을 상대로 한 철학 강좌를 기획하기도 했던 그는, 전남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과 지원으로 1년간 독일 연수를 다녀왔다. 그 뒤 본격적으로 전남 여수와 경남 거창, 광주 등에서 청소년 철학교실 수업을 진행하던 지난해 이맘때, 지혜학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벌이는 줄어들겠지만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다.

“학생들 앞에 서면 제 청소년 시절을 돌이켜보게 되죠.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잊기 위해 음악에 미쳐 밴드 활동만 하고 지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 앞에 서는 게 두려웠어요. 자꾸 제 청소년기가 떠오를 것만 같고 내가 해줄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었죠. 근데 아이들한테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어느새 제가 힐링이 돼 있는 거예요.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치유돼가는 느낌이랄까요.” 실제 그의 질풍노도의 밴드 활동은 교사 생활에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밴드를 지도하면서 아이들과 음악적·정서적 교류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해 열린 학교 콘서트에서는 학생들로부터 초대받아 애창곡인 들국화의 을 부르기도 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말을 잘하는 아이, 리더십이 뛰어난 아이 등 제자들의 놀라운 소질을 이야기할 때 아이들처럼 흐뭇해하던 양 선생님이지만 학교 생활에 대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능력이 다양하다는 것은 ‘생각의 근육’ 발달 결과도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학부모의 요구도 다양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양한 부모들의 요구에 걸맞게 각기 다른 수준의 아이들에게 고루 적합하고 적당한 교육을 하는 일은 그의 새로운 고민거리다. 비인가 시설인 탓에 지역 교육청의 지원이 없어 학교 재정이 어려운 점도 풀어야 할 숙제다.

평생 책 가까이하는 습관 얻어가길

“지식은 많지만 타자에 대한 배려도, 역사 인식도 없다면 ‘지식 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삶이 지혜학교의 목표라고 봐요. 머리부터 발까지의 거리는 존재와 무의 거리만큼 멉니다. 그래서 활동적인 수업을 통해 손으로 발로 움직여서 형성하는 지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철학을 배웠다라는 자의식보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을 얻어가기 바란다는 양 선생님이 마지막까지 던져준 ‘있어 보이는’ 화두다. 지혜학교 진학 문의 062-962-0980, 후원계좌 농협 351-0549-5512-13(사단법인 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광주=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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