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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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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지고 하루는 싸운다

송전탑 농성장 지키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박두원·박종평씨
맨날 깨지고 져도 노조를 떠날 수 없는 이들의 철탑 아래 160일
등록 2013-03-30 10:38 수정 2020-05-03 04:27

“신문 보고 전화 걸어가지고, 면접 보겠다고. ‘일단 와봐라. 일할 수 있냐’ 그러기에 ‘예’ 하고 된 거죠.”
새 직장을 구하는 일은 간단했다. 박종평(32)씨의 예전 직장은 직원이 네댓 명 되는 작은 공장이었다. 다들 가족 같았다. 사장은 그에게 야간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종평은 그곳을 그만두었다. 노동자가 되기 싫었다.
“공장 생활이 싫고 창피했어요. 어린 나이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해서 그런가, 정말 싫더라고요. 나도 대학을 가야겠다 싶었죠.”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인 박두원(왼쪽)씨와 박종평씨는 철탑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철탑, 꿈, 이별, 가족을 머리에 인 지 160일째다. 박두원 제공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인 박두원(왼쪽)씨와 박종평씨는 철탑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철탑, 꿈, 이별, 가족을 머리에 인 지 160일째다. 박두원 제공

<font size="3">“노동조합 때문에 계속 다닌 듯”</font>

손에 기름 묻히는 것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공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얌전히 앉아 있는 성격도 아니었고, 몇 개월간 입시 준비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결국 신문 구인란을 뒤적였고, 마침 자동차 업체 쪽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벗어난 현대자동차는 그간 해고한 1만2천 명의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다. 신입사원을 뽑진 않았다. 협력업체가 늘었다. 협력업체들이 사람을 구했다. 종평씨가 면접을 본 곳도 그중 한 업체였다. 일은 현대자동차에서 했다.

“입사할 땐 정규직이고 협력업체고 이런 걸 몰랐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요상했다. 협력업체 직원이면 나이가 많건 적건 정규직이 반말부터 해댔다. 어린데다 협력업체 딱지가 붙은 종평에게는 더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욕하니까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치고받고 이러니까 잘리기도 하고.”

정규직과 협력업체 직원 간의 급이 달랐다. 종평은 납득이 안 갔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래도 다녔다.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이 싫다는 그가 가진 거라고는 두 손밖에 없었다. 제 손으로 벌어야 했다. 일찍 한 결혼도 그를 현대자동차에 머물게 했다.

“1년만 다니고 자리만 잡고 다른 데 가려고 했는데, 애 낳고 나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시해도 그냥 살았죠.”

그냥 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2003년 생긴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함께했다. “더럽고 치사해도 노동조합이 생기고 처지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맨날 깨지고 져도,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에 계속 다닌 거 같아요.” 하루는 참고 하루는 싸운다. 그러는 사이 1년만 다닌다던 자동차회사에서 시간이 자꾸 흘렀다.

노동조합이 생긴 2003년은 박두원(35)씨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다. 그때 그는 구치소에 있었다.

“누나 친구가 면회를 왔더라고요. 표정이 안 좋더라고요. ‘이 말 듣고 울지 마’ 그러는데, ‘뭔데요? 뭔데요?’ 웃으면서 그랬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 듣는 순간 기분이 진짜 안 좋더라고요. 많이 울었죠.”

<font size="3">차별받고 모멸당하고 싸우고 지고</font>

아버지는 뱃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없었다. 아버지가 바다에 나가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새어머니와 보냈다. 많이 맞았다. 자주 내쫓겼다. “당시 사람들이 외식한다 하면서 먹는 게 짜장면이었다면, 어렸을 때 저희는 먹지도 못했어요.”

식구들이 단란하게 둘러앉아 외식을 꿈꿀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두원은 졸업하고 중국집에서 일을 배웠다. 음식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다 배달 사고가 났다. 주인이 말을 바꾸고, 벌금도 보상도 그의 돈으로 해야 했다. 1년 넘게 일한 식당이었다. 배신감에 더는 다닐 수 없었다. 새 직장을 찾았다.

협력업체를 통해 현대자동차에 들어갔다. 역시나 요상했다. 정규직은 자유로이 다녀오는 화장실을 협력업체 직원은 반장 눈치를 봐야 했다. 보내주지 않을 때도 많아 다 큰 성인들이 소변 문제로 다툼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은 싸우다 열이 오른 10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대로 해고였다. 해고자들은 회사 근처 자전거 보관소에 비닐을 씌우고 농성을 했다. “이래 봬도 제가 싸움은 못하지만 불의는 못 참거든요.” 그래서 같이 했단다. 2003년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도 함께했다.

그런 그에게 못 참을 일이 생겼다. 노동조합을 따라 참가한 집회였다. 서울 종묘공원이었는데, 갑자기 소란스럽더니 비명이 들렸다. 가보니, 불길이 보였다. 사람이 불타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이용석이었다. 비정규직, 이들은 곳곳에서 비슷한 처지로 살았다. 차별받고 모멸당하고 싸우고 지고, 그러다 죽음을 택했다. 그해 6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그해 가을, 서울 도심에 화염병이 등장했다. 경찰과 노동자 사이에 큰 충돌이 있었고, 연행된 이만 100여 명이었다. 두원도 잡혀가 구치소에 수감됐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은 얼마 뒤, 집행유예 판정을 받았다.

“집행유예가 뭔지도 몰랐어요. 3년 집행유예인가 그렇게 받았을 거예요. 모르니까 3년 감옥에서 사는 거구나 하고, 까짓거 살지 뭐 그랬는데. 인제 문으로 나가잖아요. 나오는데 수갑을 풀어주더라고요.”

구치소를 나와 근처 식당에 들어갔단다. 내장탕을 시켜 두 숟가락을 먹었다. 음식 남기는 법 없는 그였지만, 구치소 밥에 길들여진 입이 바깥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서울 가면 그 집 한번 들러야지, 먹어야지 했는데… 딱 10년 됐네.”

10년이 지났다. 협력업체 직원들의 처우는 예전보다 나아졌다. 화장실 간다고, 연차 쓴다고 해고 운운하지 않는다. 정규직들도 욕설부터 해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파견업체에 불과한 협력업체가 언제 문 닫을지 몰라 불안하다. 협력업체 직원치고 폐업 한번 안 당해본 이가 없다. 스무 살 초반에 현대자동차에 들어온 이들은 이제 한 가정을 꾸릴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고용 불안에 더 마음 쓰인다. 2010년, 대법원이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을 지적하며 협력업체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고 명한 판결은, 그래서 이들의 희망이었다. 판결은 지켜지지 않았다. 2년 뒤,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판결 당사자인 최병승과 천의봉이 송전탑에 올랐다. 머리에 고압 전류를 이고 160일이다.

<font size="3">“싸우면 싸울수록 바뀌어간다”</font>

종평씨와 두원씨는 그 철탑 아래서 농성을 한다. 둘 다 해고자 신세다. 파업에 참가했다는 게 이유다. 요리사가 꿈이라던 두원씨는 식당 대신 농성장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철탑 위 두 사람에게 도시락을 올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10년 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아직도 깊다 했다. 한동안 아버지 생각에 독거노인들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은 포기 못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에, “싸우면 싸울수록 바뀌어간다”는 믿음 때문에. 화장실 가는 것조차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어 얻어진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안다고 했다.

종평씨는 아내가 떠나고 혼자가 됐다. 어린 아들이 남았다. 아들과 떨어져 농성장에서 사는 그를 찾은 날, 금연 이틀째라 했다. 담배를 왜 끊으려 하냐고 물으니 “독해지고 싶어서”라 한다. 해고 2년 세월이 그에게 독함을 요구하나보다.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아들에게 승리했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싸움을 하고 싶다고. 그 끝을 보기 위해 버틸 힘이 필요한가, 막연히 생각한다. 10년 전 생활에 쫓겨 자동차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이제 온몸으로 버티고 있다. 철탑, 꿈, 이별, 가족을 머리에 이고 이들도 160일이다.

희정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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