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그러니까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다. 한 달 체류 중이다. 이곳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주 많고, 그들 집에는 냉장고가 거의 없다. 재래시장에 들렀다. 시장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작은 봉지에 조금씩 담겨 있었다. 오래 생활한 친구에게 물었다. 저건 젓갈인가? 친구는 식용유와 토마토케첩이라고 대답했다. 직접 만들어 파는 유기농이라서 저렇게 파는지 묻자, 친구는 다시 대답했다. “여긴 냉장고 있는 집이 별로 없어. 그날 먹을 것을 조금씩 담아서 파는 거야. 우리 집 헬퍼였던 마일린은 새벽 5시에 장을 본대. 그런 다음 아침에 집안일하고 남의 집 살림하러 가고.” 아, 그렇구나. 냉장고가 없구나. 깨닫고 보니 냉동육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냉장고 논쟁을 보게 되었다. 철학자 강신주가 어느 신문에 쓴,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를 말이다.
마일린에겐 냉장고가 없다
나는 그의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행복한 공동체,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생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없애라는 의견에 찬성한다. 어릴 적, 어머니는 겨울이면 냉장고를 껐다. 여름이 아니면 냉장고는 제구실을 하지 않았다. 대신 찬장에는 그날 먹을 반찬이 들어 있었다. 모든 계절마다 우리는 잘 살아냈다. 어머니 덕분이었다. 냉장고 전기조차 아낄 정도로 알뜰한 당신이었으니 남는 음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음식을 딱 그만큼만 했고, 아침·점심·저녁 한 끼도 남의 손에 가족의 먹을거리를 맡기지 않았다. 집 앞 정육점 주인은 돼지고기 반근도 넉넉히 끊어주던 영숙이 엄마였다. 그리고 옆집 사는 성미네 제사가 오늘이라는 것을 알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강신주의 제안에 동의한다. 우리는 냉장고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아니 더욱 잘, 살 수 있다. 많이 나누고 많이 아낄 수 있다. 과장 딸내미가 네 살이 되는 동안 냉동실 안에서 홀로 나이 먹어가는 돌떡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 시어머니가 싸주신 갓김치는 무르다 못해 요구르트만큼 격하게 발효를 했으니, 이보다 불행한 변신은 없을 것이라며 김치통 붙잡고 반성하는 일이란…. 그렇게 우리는 냉장고가 품은 변화에 탄복과 자괴감에 빠지지 않아도 될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무릇 냉장고만 그렇겠는가. 전자레인지는 어떻고, 전기밥솥은? 세탁기는? ‘편리해요, 빨라요, 예쁘지 않아요?’ 어서 소비해달라며 늘 새롭게 생산되는 상품들은? 그 모든 것의 자본주의적 사명에 대해, 철학자는 말했었다. 자신의 책에서 언급한 대로 근대 파리의 아케이드와 백화점, 물신의 욕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냉장고를 빌려 이런 식의 삶은, 너무 괴롭지 않으냐고 사실은 우리를 너무 괴롭히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음을 이해한다. 다시금, 100% 꽉 채워 동의한다.
내가 강신주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유그러나 나는 강신주의 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냉장고를 버리라는 글을 읽은 날 마침, 헬퍼 마일린의 냉장고 없는 삶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장고 판매사업 총괄책임자도 아니고 전력수급정책 고위 관리자도 아니며 더욱이 대통령도 아닌 철학자가 일으킨 냉장고 풍파에 대해서 굳이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냉장고를 버리라는 글에 마일린의, 추위가 살며시 내리는 늦가을 무렵 냉장고 전원을 끄고 찬장을 다시 닦던 어머니의 노동이 냉장고만큼이나 중요한 주제여야, 철학은 빈곤하지 않다는 것을. 땀 한 방울은 언제나 소금 한 주먹보다 짜다는 것을. 억압은 자꾸 아래로 아래로만 흐른다는 것을. 그걸 잊지 말아야 냉장고도 버릴 수 있지 않겠나, 이야기하고 싶었다. 냉장고를 위한 변명이 아니다, 마일린을 위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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