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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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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이 걸린 오늘

등록 2012-12-07 09:06 수정 2024-02-29 14:06

초짜 기자일 때 정년 퇴임을 앞둔 강력 사건 전문 형사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의리 있고 착한 조폭 좀 소개해주세요. 친구 하게.” 그 형사의 반응은? “이 기자, 영화 많이 봤구먼. 세상에 착한 조폭은 없어.”

영화 <26년>을 보다 엉뚱하게도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을 향한 피해자 유족들의 사적 복수를 그린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장편 상업영화다. 영화에서 곽진배는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 충격으로 실성한 어머니와 함께 산다. 광주의 조폭 수호파의 넘버2로 살아가는 그에게 계엄군 출신의 대기업 총수 김갑세가 찾아와 ‘그 사람’의 사과를 받아내려는, 사과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진배는 갑세의 ‘처단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계획이 어찌어찌 노출되자 검사가 보스를 찾아와 진배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보스는 모르쇠로 일관하다 감옥에 갇힌다. 변장을 하고 면회를 온 진배에게 보스가 회한에 찬 낯빛으로 말한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하려고도 않았던 내가 쪽팔리다. 진배야 앞만 보고 냅다 뛰어.” 수호파 조직원들도 진배를 헌신적으로 돕는다. ‘그 사람’의 서울 연희동 대저택을 습격하러 갈 때 버스 안에서 진배가 당부한다. “연장은 절대 쓰지 마라. 오늘만큼은 우리는 건달이 아니다. 광주의 아들들이다.” 물론 영화다. 현실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겪었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영화에서 우여곡절 끝에 갑세가 대면한 ‘그 사람’에게 거듭 사죄를 촉구하자, ‘그 사람’은 “이 친구 정말 지루하구먼”이라며 말을 자른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유족들의 참혹한 기억이, ‘그 사람’에겐 지루하단다. ‘그 사람’의 사죄를 받아내려 해야지 죽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권정혁을 향한 심미진의 냉소가 가슴을 찌르는 까닭이다. “우린 그 사람한테 사과할 기회, 충분히준 거 같은데?” ‘80년 5월’ 탓에 미진은 부모를, 정혁은 누나를 잃었다. 국가대표 사격선수인 미진은 ‘그 사람’ 저격 담당이다.

(근현대 사법체계는 사적 복수를 배제한다.)

<26년>은 애초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투자사들이 하나둘 손을 뺀 탓에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제작자인 최용배 청어람 대표의 말은 이렇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길 원하지 않는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개인들이 있었다. 결국 그 개인들이 이겼다.” 상업영화 사상 초유의 제작두레에 1만5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해 7억원을 제작비로 보태줬다. 영화는 3만1천 명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시사회를 거쳐 11월29일 개봉했다. 뜨거운 마음을 지닌 시민들이 거대한 장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영화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기억은 힘이 세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내지 않으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 영화 <26년>이 전국 수백 개의 스크린에 걸린 오늘이 ‘그 사람’에겐 어제보다 나쁠 터. 그러나 영화 속 진배나 미진과 함께 하고픈 시민들에겐 오늘이 어제보다는 티끌만큼이라도 나을 것이다. 수백만의 시민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 소망만큼 세상은 정의에 다가설 것이다. 미래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낯모를 손님이 아니다. 내일을 만드는 건 오늘의 삶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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