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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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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은 ‘완전소중’하다

‘지을 땅 있고 먹고살 수 있으면’ 농사지을 텐데, 지금까지 정책은 기업농·대농 중심… 먹거리를 책임지는 ‘소농’을 지켜야
등록 2012-11-16 08:00 수정 2020-05-02 19:27

나의 할아버지는 소농이셨다.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딱 한 마리 키우던 소에게 쇠죽을 쑤어주시던 모습이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가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온 세대다. 그러나 요즘 아버지는 다시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마을을 왔다갔다 하시며 약간의 벼농사를 짓고 계신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신 장인·장모님도 아직 농사를 짓고 계신다. 덕분에 쌀은 양가로부터 얻어먹고 있다. 얼마 전 딸아이는 ‘아빠도 나중에 농사를 지어서 나에게 쌀을 보내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웃으며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너도 네 자식에게 그렇게 하라고 얘기해줬다. 이 약속은 꼭 지키려고 한다. 농사는 우리에게 탯줄 같은 것일지 모른다.
곡물자급률 26%, 그나마도 줄어들어
어느덧 기차가 홍성역에 도착했다. 차를 얻어타고 간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추수가 끝난 들판이 보인다. “선생님, 올해 쌀농사는 어땠습니까?” 신문에서는 올해 쌀 생산량이 407만4천t으로 지난해보다 15만t 이상 줄어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곡물자급률이 26%에 불과한 나라에서 그나마 자급이 되던 쌀조차도 수확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비교적 괜찮은 편인데, 인근 지역에서는 농사가 잘 안 된 곳이 많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 논은 가뭄이 심할 때 물을 잘 못 대줘서 그런지 수확이 30% 정도 줄었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분은 ‘풀무학교 전공부’ 강국주 선생님이시다.
‘풀무학교 전공부’는 농업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교육기관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 사회생활을 하다가 농업에서 삶의 방향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는 교육기관이다. 한 해 10명의 학생이 입학한다.
풀무학교 전공부가 있는 곳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이다. 친환경 농업과 대안적인 삶을 일궈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안철수씨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농민들의 얘기를 듣겠다며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오면 놀랍다. 청년들이 농업에서 삶의 길을 찾겠다고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농업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농업이 유지되려면 농지가 있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농지는 계속 줄어들고 농민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전체 농지의 20%가 사라졌다. 신도시로 개발되고, 4대강 사업의 와중에 사라지고, 도로로 뒤덮였다. 농민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되었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가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5% 남짓한 수준이다. 농촌에 가보면 농민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고령자다.
“그동안 정부가 세워온 농업정책은 모두 실패했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보면 복잡하기만 하고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정책들이에요. 기업농이나 대농들 중심으로 지원되고, 소농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정책들이에요.” 풀무학교 전공부의 또 다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그동안 정부는 외국 농산물에 시장을 개방하면서도 농업을 지원하는 데 많은 예산을 쓰겠다고 약속해왔다. 실제로 많은 돈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농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작 사람이 농촌에서 정착하고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되는 돈은 적었다.
농민에게 기본소득 보장을
농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물어본다. 대답은 간단하다. “농사지을 땅이 있고 농사를 지어 먹고살 수만 있다면 농사지으려고 할 사람은 많을 겁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 임대료로 땅 주인에게 30~40%를 줘야 한다. 임대료 주고 영농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지 않으려면 땅을 사야 하는데, 땅값은 엄청나게 올랐다. 평당 수십만원인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농지 가격이 평당 수십만원인 것은 이미 농지가 아니라 투기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처음에 귀농해서 농사를 짓는데, 10년 이상 연수입이 1천만원을 넘은 적이 없었어요. 나야 내 소신대로 사는 것이지만, 농민에게 이런 상황을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농민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게 필요합니다.”
농민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한다? 이것은 녹색당의 총선 공약이기도 했다. “누가 농민인지, 어떤 기준으로 지급할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저는 이런 정책이 있어야 농업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꿈같은 얘기일까? 강화도에 귀농해 친환경 학교급식운동을 해오신 김정택 목사님을 만나 물어보았다. 우리 농업에 대해 누구보다도 고민이 깊으신 분이다.
“나는 곡물자급률도 높이고 농민의 생활도 안정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잡곡을 재배하는 농민에게 평당 얼마를 현금으로 지급해서 잡곡 생산량을 늘리고 농민에게 소득도 보장하자는 것이지요.” 다만 그는 지원의 초점이 소농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해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짓는 소농에게 도움이 되는 농업정책이 진정으로 환경을 지키고 농업을 살리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인류를 먹여살려온 것은 소농이다. 아프리카의 가나는 1970년대에 소농이 국내에서 소비되는 쌀의 전량을 생산했다. 그런데 농산물 개방으로 소농이 몰락해 현재 가나는 쌀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우리나라도 여전히 소농이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집에 돌아오니 이번호(11~12월호)가 도착해 있다. 책을 펴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온 송기호 변호사의 글이 실려 있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한-미 FTA를 반대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송 변호사는 그 가치를 ‘소농의 가치’라고 진단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농지개혁을 통해 형성된 소농들이 동아시아 사회의 뿌리이고, 이들이 협동하며 농사짓고 비교적 균등하게 살아온 게 우리 사회라는 것이다. 평등을 중시하는 가치체계, 아무리 경쟁이 심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같이 살자’라는 생각이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뿌리에는 바로 ‘소농’이 있다는 것이다.
한-미 FTA로 지키려던 가치는
자동차 팔아서 밥을 해결하겠다는 게 한-미 FTA를 추진한 발상이지만, 앞으로는 자동차 팔아도 밥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위기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 2008년 러시아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밀 수출국인 러시아는 수출을 통제했다. 자기 나라 국민도 먹을 게 없는데 수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농업을 살리는 것은 주권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다.
이번 대선에서도 농업은 소외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도 ‘복지’도 농업을 지키려는 노력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공허한 얘기가 될 수 있다. 농업을 살리고 소농을 살려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때다.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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