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은 우리 사회에서 많이 얘기되지만 그 뒤를 이은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에서는 지난 9월 노동자대투쟁 25주년을 맞아서 이를 기억하며 현재의 노동운동을 점검하고, 노동운동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토론했다. 나는 토론에 참가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서로 답답한 얘기만 나누었다는 후문을 듣는다.
노동운동이 위기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몇 개나 있을까? 노동조합 조직률은 왜 이제 10%도 안 될까? 25년 전인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1300개도 넘는 민주노조가 세워져 오늘의 민주노총의 기반을 다졌던 그 대투쟁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얼치기 노동운동가 시절
나도 한때는 노동운동가였다. 채 1년도 하지 못한 노동자 생활이었다. 1980년대 대학에서 운동을 배웠던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나면 당연히 노동현장으로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나도 강제징집을 당한 군대에서 노동자들의 투쟁 소식을 들었다. 1984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섬유산업-여성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을 넘어 남성-대기업 노동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 파업이 지닌 위력을 알려주었다. 전두환 독재정권하에서도 노동운동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뛰었다. 그리고 군 복무를 마칠 무렵에 터져나왔던 구로동맹파업은 구로공단 일대를 마비시켰다. 한 지역이라도 연대파업을 하면 지배세력에게 큰 파괴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런 소식들을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당연히 가는 노동현장이 아니라 평생 노동운동을 하며 살고 싶다는 열망에 들떴다. 1985년 8월 제대한 뒤 ‘현장이전팀’이라고 불리는 노동운동 준비팀에 들어갔고, 인천 부평 지역에 가서 먼저 교회에 장소를 확보해 노동자들의 생활야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결국 야학 준비를 때려치우고 부평 지역에서 위장취업을 하기로 했다. 몇 군데 공장에 들어갔다가 며칠 만에 나오기를 반복했다.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위장취업자가 워낙 많았던 탓에 노동부·경찰·검찰·안기부까지 나서서 위장취업자들을 색출했다. 그래서 우리 같은 학출(‘학생운동 출신’이라는 뜻)들은 자취하는 방을 관리하는 일에도 무척 신경 써야 했다. 집주인이 이상한 사람들이 방을 빌려서 쓴다는 신고만 해도 방이 털리고 잡혀가는 일이 다반사였던 때다. 우리 방도 한 번 털릴 긴박한 상황이 닥쳐서 짐을 그대로 둔 채 몸만 빼서 달아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위장취업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생겨먹은 외모부터가 대학 출신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공장을 찾아온 총각 정도로 보여 공장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다. 다른 학출들은 그야말로 먹물 냄새를 지우려고 노동판에 일부러 가서 몇 달을 일하거나, 손바닥에 굳은살을 만들려고 힘든 일을 일부러 찾아서 하고, 용접 같은 기술을 어렵게 배우고는 했지만, 나는 외모가 무기였기에 그런 걱정은 없었다.
짧았던 승리의 기억, 아픈 회유의 시간
고무장갑 공장을 사흘 만에 때려치운 다음에 찾아간 곳은 목장갑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주·야간 맞교대를 하며 장갑 짜는 기계에 실과 바늘을 갈아주고 쌓이는 장갑들을 1차 포장 하는 일이었다. 고참들이야 여유 있게 놀면서도 하지만, 신참 노동자들은 12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이었다. 바늘을 부러뜨리고 온갖 실수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도 한 달 정도 지나니 차차 일이 손에 익었다. 고참들도 내가 일을 잘한다며 눈썰미가 있다고 칭찬해주었다. 세상에 대학을 다니며 교수님한테 한 번도 칭찬 같은 걸 듣지 못해서인지 나는 고참들의 그 칭찬이 아주 좋았다. 일 끝나고 졸린 눈을 하고도 그들과 어울려 나누는 소주 한 잔과 돼지 껍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여기서 노동자들을 꼬여 의식화팀을 만들자는 희망도 보며 말을 조심스레 건넬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하니 회사 관리자 누군가가 공장 공터에 노동자들을 불러 세웠다(그러고 보니 그때는 ‘노동자’라는 말도 입에 올릴 수 없던 시절이었다). 한명 한명 호명을 했다. 나도 그 축에 들어서 열외자 그룹이 되었다. 그러고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란다. 이런 황당한 데가 어디 있나. 겨울 동안 물건을 많이 쌓아놓았으니까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신참들은 대부분 열외자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이대로 그만둘 수 없다며 고참들도 설득했다. 내일 아침 출근 시간에 모여서 작업을 거부하자고 했다. 잘될까 하는 불안감으로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아침 공장에 가니 사람들이 진짜 작업을 거부하고 회사를 성토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노동자 120명 중에서 10여 명은 공장에 들어가 일을 했고, 당장 그들에게 배신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는 억울하다며 한바탕 공장에서 집회를 했다. 그리고 인천지방노동청으로 몰려가서 부당해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니 회사가 없던 일로 하잔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루 만의 파업 끝에 너무도 손쉽게 승리를 얻었다. 우리는 신나서 쓴 소주에 돼지 껍질을 앞에 놓고 무용담을 말했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경험 있는 노동운동가라면 그때 승리감에 도취돼 술에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사는 바로 그때부터 주동자들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되었고, 위장취업자를 찾아내려 한명 한명 면담을 해갔다. 분열과 회유. 우리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서 유인물을 노동자들의 집에 뿌리고 매일 그들을 찾아갔지만 회사의 회유에 말린 고참들이 돌아섰다. 하나둘 회사가 던져주는 위로금을 받고는 공장을 떠났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 사실 나는 위장취업자임을 내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 내가 실제로 집회를 선동하고 작업 거부를 주동했지만 나를 위장취업자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회사에서 부평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고향 출신 경찰을 만나서 입건까지는 되지 않고 풀려났다.
지금도 87년 그 날이 그리운 이유
그 뒤 해고자 생활을 하다가 해고자들과 점거농성을 하고 감옥에 갔다. 나의 노동운동 시절은 이렇게 1년도 안 돼 끝났다. 다음해 6월항쟁 덕분에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나온 뒤 맞부딪친 게 노동자대투쟁이었다.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파업을 하고 하나하나 노동조합을 만들어갔다. 그때 만들었던 1300개의 노조는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민주노총의 근간이 되었다.
그런데 노동자대투쟁을 시작했던 현대그룹의 노동자들이 내건 요구 사항 중에 ‘두발 자유, 복장 자율’ 같은 게 절반이 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만큼 노동현장은 군대식으로 규율됐다. 노동자들의 권리? 어림없는 소리였다.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밀착한 대기업 재벌들이 노동자 권리를 보장할 리 없고, 노동조합을 인정할 리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이렇게 대규모로, 폭발적으로 터졌다.
그때 나는 감옥에 갔다 온 석방 노동자이자 양심수로서 노동자대투쟁에 연대했다. 인천 지역에도 그런 분위기가 확산돼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어느 공장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고 하면 그 지역의 모든 운동가들, 노동운동가만이 운동을 하던 노점상, 철거민, 학생 등이 한꺼번에 조합이 결성된 사업장으로 몰려가 노조원들과 힘을 보탰다. ‘파죽지세’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밤을 새워 같이 농성하고 힘을 모으다 보면 노동조합이 하나둘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우리는 힘든 줄도 몰랐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두런두런 모여 앉아 지역 사안에 대해 논의하던 그 밤의 연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요즘에는? 중요한 노동 사안이 터져서 인권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나가보면 그때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겨우 조합의 간부들이나 와서 대강 시간을 때우고 흩어진다. 그때의 위력이나 열정, 기세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런 파업, 그런 투쟁, 그런 연대에 겁을 집어먹을 자본가가 있을 리 없다. 조합원 없이 간부만 움직이는 노동조합은 점점 힘을 잃어버렸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는 말한다. 요즘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장기투쟁 사업장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내게 인권운동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는 것 같다고. 이력을 밝히기도 창피한 얼치기 노동운동가였던 내게는 당치도 않은 말이다. 지금 나는 인권을 말하고, 인권을 실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인권 문제는 역시 노동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안보다 노동 현안들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노동의 힘 없는 복지의 미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 없이 비정규직이나 정리해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정권과 자본가의 배려 속에서 노동권이 확보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사회복지국가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의 힘 없이 만들어지는 사회복지국가는 언제고 철회될 수 있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힘으로 만들어내고, 힘으로 지키고 강화할 때만 그것이 온전히 노동자의 것이고, 그토록 정치권 인사들이 힘주어 말하는 서민들의 것이 된다. 배려와 양보로 만들어지는 제도는 한낱 모래 위의 성처럼 가뭇없이 사라짐을 이명박 정권에서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경제적 민주화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연대를 통한 힘으로 안정되고 공정한 일자리를 획득하며 경제적 주체로 서는 것이어야 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때 모닥불을 피워놓고 두런두런 모여 앉았던 밤이 그리운 이유다.
노동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제대로 해보겠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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