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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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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쪽방촌에서 밥과 정을 나누다

서울 동자동 쪽방촌의 사랑방 식당 ‘밥이 보약’ 운영 고형렬씨
“이들에겐 밥과 라면도 필요하지만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
등록 2012-03-23 10:44 수정 2020-05-03 04:26

여기 밥은 맛있다. 나쁜 재료를 쓰지 않고, 조미료는 과하지 않고, 밥상은 정갈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부엌은 깨끗하고 환하다. 손님이 드문 시간이면 그 부엌에서 누룽지가 만들어진다. 남은 밥을 눌러 구워 봉지에 한가득 담아 싼값에 파는 누룽지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는 ‘희귀 아이템’이다. 수작업으로 일일이 만드는 것이라 몇 봉지 나오지 않아 일찍 가지 않으면 구하기 힘들다. 그걸 사서 입맛이 없을 때, 홀로 먹을 때, 돈이 없을 때 물에 끓여 밥처럼 후루룩 마신다. ‘밥이 보약’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밥집이다.

고형렬씨는 식당에 너무 많은 손님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빠서 말 한마디 나누기 힘들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것은 ‘밥이 보약’의 취지에 맞지 않는단다. <한겨레21> 탁기형

고형렬씨는 식당에 너무 많은 손님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빠서 말 한마디 나누기 힘들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것은 ‘밥이 보약’의 취지에 맞지 않는단다. <한겨레21> 탁기형

대기업 근무하다 퇴직하고 빈민운동나서

꽤 괜찮은 식당이네 하겠지만, 이곳은 그냥 밥집이 아니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운영하고 있는 마을 공동체 운동의 작은 공간이다. 동자동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쪽방촌이 있는 곳이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이곳에 사랑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인권단체가 들어왔다. ‘동자동 사랑방’의 창립 멤버이자, 지금은 ‘밥이 보약’ 밥집을 돌보는 고형렬(43)씨를 만났다.

학생운동 시절은 오히려 노동운동과 가까이 지냈다. 졸업 뒤 대기업 연구실에 취직했다. 그러다 퇴직하고 봉천동 달동네에서 공부방 자원활동을 했다. 그렇게 연이 닿아 용산에서 노숙인 자립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실무자로 일했고, 이후 엄병천 대표와 ‘동자동 사랑방’을 만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원활동이라니. 갈등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못 견디게 회사가 싫었다. 늘 긴장해야 하고, 생산성에 모든 초점이 맞춰진 생활이 지긋지긋했다. 그는 자신을 불량품이라 여겼다.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생산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량품. 그래서 나 같은 불량품이 내 방식대로 생산을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1~2년간 산을 돌아다니며 방황했다. 그러다 들어간 곳이 공부방이었다.

당시 달동네를 중심으로 생겨난 공부방들은 먹고살기 바쁜 부모와 무관심한 학교를 대신해, 갈 곳 없고 기댈 곳 없는 아이들을 모았다.

“아이의 문제가 그 아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집안 문제고, 그 집안 문제는 사회의 문제고. 그런데 아이들한테만 손가락질을 한단 말이에요. 왜 너는 불량하게 다니니? 그 아이가 처음부터 불량하게 태어났겠어요? 지금의 사회 시스템이 그 아이를 만들어놨지.”

달동네가 공간인 만큼, 공부방 자원활동 경험은 그를 빈민운동으로 이끌었다. 쪽방촌 주민들에 대한 시각은 공부방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처음부터 쪽방촌에 살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처음 들어와서 여기 계속 있겠다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살다 보니 못 나가는 거죠. 외국 논문을 봤는데, 노숙인들의 스트레스가 전투 현장에 나간 군인과 같은 수준이랍니다. 이런 사람들한테 ‘라면 하나 줄게’ ‘밥 한 끼 줄게’ 이걸로 끝이면 안 되죠. 밥과 라면도 필요하지만, 이 사람들과 같이 놀아줄 사람도 필요하고 이런 사회 시스템을 바꾸자 이야기할 사람도 필요한 거죠.”

식당 수익은 쪽방촌 이웃들에게 환원

하지만 마음이 있다고 해서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동자동 사랑방’을 만들었지만, 주민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 칸짜리 방이 답답하고 싫어 밖으로 나갈 것 같지만, 오히려 쪽방촌 주민들은 집에만 머무는 경우가 많다. 나가봤자 돈만 들고, 마땅히 할 것도 없다. 다른 사람과 자신이 비교되어 비참하기만 하다.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그들은 쪽방에 자신을 가둬둔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술을 마신다.

주민들과 공동체 속에서 같이 놀 생각으로 만든 사랑방이지만,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함께 놀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을 했고, 그는 가볍게 결정했다. 쪽방촌에 같이 살자. 그는 지금도 쪽방에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 머무니, 이제 쪽방촌 사람들을 잘 알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했다.

“처음엔 ‘빨갱이 아니야?’ 그러기도 했는데, 지금은 주민들이 저를 그렇게 보지는 않고 그냥 ‘같은 편? 나의 우군?’ 그 정도예요. 같은 주민으로 보지는 않고요. 아침마다 순찰 돌듯 집마다 방문하면 그분들이 자기 이야기도 들려주고 그래요. 저쪽은 저쪽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저는 제 나름의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거예요. 인권이란 사람이 살 수 있는 권리인데, 저는 그냥 그 권리를 같이 찾아가는 사람이죠.”

말은 그렇게 해도 주민들은 그를 꽤 챙기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보고 싶다고 해서 갔더니 주민 한 명이 중국요릿집으로 끌고 갔다고 했다. 그도 자기 돈 내고 못 먹는 고급 짜장면을 사주었단다. 감사히 얻어먹었다. 맛나게 먹고, 다음에 식당 반찬이라도 손에 들고 찾아가는 것이 그의 답례 방식이다.

그가 밥집 일을 한 것은 두 달 전부터다. 2년 동안 사랑방을 비웠고(그동안 충남 공주에서 농민회 활동을 했다), 다시 돌아와서는 ‘밥이 보약’ 밥집 일을 맡았다. 식당 수익은 쪽방 주민들에게 환원한다. 식당을 통해 생기는 일거리는 쪽방 주민들과 나눈다. 식당을 주민들이 모여 담소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이것은 그가 바라는 일이며,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쪽방에 계시는 분들이 단신 가정이 많아요. 밥집이다 보니까, 참 이야기하기 좋잖아요. 형님, 밥이나 한 끼 합시다. 밥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할 수 있고, 사람들도 어울리고.”

식당에 있다가 기분이 내키면 쪽방촌으로 올라가 사람들과 술 한잔하고 수다를 떨다 온다. 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그가 사라지면 쪽방촌에 갔나 보다 한다.

“그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느끼려고 이런 데서 일하는 거잖아요. 정치단체 같은 데서 정책을 만들고 정치세력화를 한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 모르겠고. 그냥 들어주는 역할만으로 벅차고 소중하고. 예전에는 그것을 모아서 뭘 해볼까 했는데, 이제는 같이 느끼는 존재로서 살려고요.”

작고 불편해 보여도 소중한 공간

그래서 그는 너무 많은 손님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빠서 말 한마디 나누기 힘들 정도로 장사가 잘되는 것은 ‘밥이 보약’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찾는 사람이 없으면 처음 식당을 연 이유조차 사라지니 그는 고민이다. 수익이 나지 않으면 쪽방촌 주민들과 나눌 것조차 없다. 현재 ‘밥이 보약’에서는 쪽방촌 주민 한 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동자동 사랑방’은 쪽방을 이리 소개한다. “가난한 동네이지만 먹을 것을 나누고 입을 것을 나누는 곳이 있습니다. 회색 서울 하늘 아래 한두 평의 방. 몸 하나 누워 쉬는 쪽방이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편안한 공간입니다. 작고 불편하게 보여도 소중한 공간입니다.”(후원계좌 동자동 사랑방 1005-001-324038 우리은행)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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