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 투쟁’의 핵심은 ‘무조건 스트레스 줄이기’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빠른 눈치와 넓은 오지랖으로 점철된 피곤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술자리 약속이 2개든 3개든 되도록이면 모두 얼굴을 비추려고 동분서주했다. 주는 대로 업무를 도맡고 부서 내의 문제나 갈등 상황에 꼭 끼어들어 감정노동을 했으며 노조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남편이 1년 동안 해외 지사에 나가 있게 됐을 때 마침 우리 회사에서도 1~3개월씩 유급휴가를 권유했는데 “한창 일할 나이에 무슨 휴직이냐”는 선배들의 말에 천금 같은 기회도 날려먹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노키드 포기’를 선언했으니 나도 이젠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회사 일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마음 쓰고 몸 쓰며 전전긍긍하는 엄마 때문에 뱃속의 아이가 괴로워하는 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 다음에 임신하게 될 후배들을 위해서도 ‘이기적인 전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회사에 “임신을 했으니 내근을 할 수 있는 부서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경찰기자였던 나는 각종 사건 현장을 들쑤시고 다니며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난해 7월 서울 지역에 산사태와 수해가 발생했고, 취재와 기사 작성을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정기 인사가 예정된 11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11월이면 이미 임신 6개월이 넘어선다. 입덧이 심하고 유산의 위험이 높은 임신 초·중반기를 경찰기자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러 말을 들어야 했지만 결국에는 9월, 내가 지망한 부서로 옮겨갈 수 있었다.
다음으로 회사에 ‘내근직 임신부를 위한 주차권’을 요구했다. 배가 불러와도 만원 버스에서는 아무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갈수록 출퇴근이 힘겨워졌지만 주차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회사에서 평기자가 주차권을 갖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회사에서는 주차권을 주며 “특별히 주는 것이니 조용히 쓰라”고 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밝혀둔다. 요구하면 주니, 임신한 후배들이여 나를 따르라.
노조에 ‘한겨레 보육시설’도 제안했다. “한겨레에 보육시설을 만드는 문제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는 안경환 교수의 말도 함께 전달했다. 여성 조합원들과 삼삼오오 모여 한겨레 보육시설의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다행히 노조와 경영진이 합의해 올해 상반기에 위탁 보육시설을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야호.
여기에 몇몇 개인적 행운이 더해지니 투쟁의 성과가 더욱 빛났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출근길에는 예쁜 카페와 꽃집이 있다. 태교를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책을 읽다 보니 사람 관계가 다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입덧으로 고기 냄새가 싫어져 고기를 멀리하고 술담배도 못하게 되니 몸이 한없이 깨끗해졌다.
그랬더니만!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악관절 장애가 사라졌다. 입을 벌릴 때마다 관절에서 소리가 나고 통증이 지속되는 ‘악관절 장애’는 2007년 결혼 준비와 함께 왔다. 병원에서는 악관절 장애가 ‘잘 때도 이를 악물고 자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매주 이어지는 마감에 결혼 스트레스가 겹쳐 몸이 늘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몸의 긴장을 푼다는 핑계로 술담배를 했고 그럴수록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그런데 곤란이가 오고, 임신부 투쟁을 통해 ‘나를 먼저 돌보는 법’을 찾아가면서 악관절 장애가 사라졌다.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전전긍긍하던 내게 곤란이가 말하는 듯했다. “여유 좀 가져!” 이렇게 하나씩 깨달으며 인생은 흘러가는가 보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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