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편복지를 실현하려면 세금을 올려야 한다는 증세에 지지한다.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을 모른다고 핀잔을 주는 동료들도 있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증세는 독배라고 말한다. 이유는 많다. ‘세금이 함부로 쓰인다고 생각하는데 증세를 요청하기 힘들다’ ‘아직까지 복지 체험이 턱없이 부족해, 증세 동의를 이끌기 어렵다’ ‘서민 생활이 너무 어려워 세금폭탄론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증세 없이 보편복지 가능할까?
인정한다. 조세 불신이 큰 대한민국에서 증세 이야기는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 번도 증세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민심이 복지를 열망한다. 이는 막대한 재정을 수반하는 일이다. 보편복지 세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사실상 증세 없이 재정을 마련하겠다는 민주당의 길이다. 얼마 전 민주당은 대형 국책사업과 사회간접자본(SOC) 지출 등을 손보는 재정 개혁,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등을 개선하는 복지 개혁, 부자감세 추가분 철회 등을 통한 조세 개혁을 통해 연 33조원을 마련하는 재정 방안을 내놓았다. ‘3+1 복지’(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와 반값 등록금)에 17조원을 사용하고 이후 일자리, 주거복지, 취약계층(저소득층·노인·장애인 등) 복지에 나머지 16조원을 활용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제 재원 방안을 마련했으니 보편복지가 선거용 포퓰리즘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한다.
보편복지를 주창하면서도 그동안 재정 방안을 내놓지 않던 민주당이 종합 방안을 발표한 것은 긍정적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우선 보편복지에 필요한 지출이 과소 추계돼 있다. 무상급식·무상보육을 위한 지방정부의 몫은 아예 계산에서 제외됐고, 의료 보장성 범위도 무상의료로 불리기엔 낮은 수준이다. 반면 재원 방안은 과대 추계돼 있다. 특히 소득세, 법인세 추가 감세 계획 철회로 7.2조원이 마련된다는 셈법은 동의하기 어렵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세율 인하를 원상회복한다면 새로 재원이 생기겠지만, 아직 시행되지도 않은 계획을 철회한다고 지금보다 재정이 확충되는 것은 아니다. 내 계산으로는, 민주당이 3+1 복지에 사용하고 남는 실제 재원은 16조원이 아니라 3조원에 불과하다. 이 돈으로 이후 주거, 저소득 계층, 노인, 장애인 등에 대한 수십조원의 복지지출을 충당하기에는 어림도 없다(구체적인 내용은 2011년 9월6일치 ‘증세 없는 33조원? 계산이 틀렸다’ 참조).
보편복지를 다음 정권에서 추진한다면 연 60조원 이상의 추가 재정이 필요하다는 게 진보 진영의 일반적 의견이다. 민주당의 계산보다 두 배나 많아 부담스러우나 보편복지 세력임을 자임하려면 감당해야 할 금액이다. 이래도 우리나라 복지지출 규모는 지금의 국내총생산(GDP) 9%에서 14%로 상향할 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9%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
민주당의 복지재정 방안이 왜 이렇게 궁색해졌을까? 애초에 ‘증세’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증세 없이 복지재정을 확보하고 여기에 복지지출을 맞추려다 보니 내용이 엉성해졌다. 이 방안으로는 내년 대선까지 보편복지 담론을 지키기 어렵고, 그래서 위험하다. 과거와 달리 내년 선거 공간에서 복지 공약은 보수세력뿐만 아니라 시민에 의해 엄격히 검증받을 것이다. 보수 후보는 ‘균형재정’을 내세우며 재정의 치밀한 관리자임을 과시할 텐데, 재정 방안이 부실한 복지 후보는 나라 재정을 위험으로 모는 초보 운전자로 비칠 것이다. 근래 지출 개혁만으로 복지를 확충할 수 있다는 장밋빛 공약으로 집권했다 결국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휘청거리고 있는 일본 민주당의 사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증세를 위한 3단계 실천 활동
그렇다면 보편복지 세력에게 증세는 회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제 논점은 증세 여부의 선택이 아니라 증세 ‘방안’에 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조세저항 장벽을 넘어서는 증세정치를 논의해야 한다. 종종 증세론이 재정지출 개혁을 간과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데, 이는 오해다. 복지재정을 마련하려면 무엇보다 토목지출을 줄이는 재정 개혁, 과도한 비과세 감면을 정비하는 조세 인프라 개혁을 선행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쥐어짜도 지출구조 개혁으로 20조원 이상 마련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기에 증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래 고무적인 일은, 보편복지 담론이 확산되자 세금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아직 과반수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복지가 늘어난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시민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전 글에서 부자들에게 ‘내라!’고 요구하는 것을 넘어 보편복지를 바라는 시민들이 ‘내자!(낼 테니 내라)는 참여재정운동을 제안했다. 복지재정도 마련하고 대중적 복지주체도 형성하자는 운동이다. 증세가 독배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어떻게 ‘지혜로운’ 증세운동을 펼칠 수 있을까? 향후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하며 3단계 실천 활동을 제안한다.
첫째, 재정지출 개혁 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보편복지 세력의 원탁회의를 구성하자. 아무리 복지가 바람직하더라도 재정지출에 대한 불신이 완화되지 않는 한 증세 주장이 힘을 얻기 어렵다. 이에 증세운동의 첫 단추는 세금 논의에 앞서 지출 개혁 프로그램을 확정하는 일이다. 아직까지 보편복지 진영의 지출 개혁 논의는 선언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두 번이나 집권 경험을 가진 민주당이 내놓은 지출 개혁 방안도 부문별로 5~50%를 절감한다는 총론적 언급에 그친다.
조속히 재정지출 개혁을 위한 공동작업이 시작돼야 한다. 이래야만 지출 개혁만으로 충분한지, 추가 재원 논의가 필요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 얼마 전 참여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황성현 교수(전 조세연구원 원장)가 재정지출 개혁을 주관할 기구로 ‘국민세금가치실현위원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이름이야 어떻게 정하든, 적절한 제안이다. 조만간 보편복지 세력들이 모여 지출 개혁 방안을 확정하고, 집권 이후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시민들에게 제시하기 바란다.
둘째, 다가올 복지를 실감하는 사전 체험 활동을 벌이자. 아이들 점심 급식이라는 조그만 경험으로도 보편복지를 상상하는 게 우리 시민들이다. 그만큼 복지 열망을 마음속 깊이 지니고 있다.
지난봄 최저임금 교섭이 한창일 때, 진보신당은 자신의 최저임금 적용 여부를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해 주목받았다. ‘보편복지 체험’ 애플리케이션은 어떨까? 이 애플리케이션에는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 국민연금, 기초노령연금, 최저생계비, 공공임대주택, 장애인연금 등 복지가 확대됐을 때 제공될 급여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 각자 자신의 가족 구성과 소득수준 등을 입력하면 해당 가구가 받게 될 복지급여 내역서가 산출될 것이다. 지금보다 무엇이 좋아지는지를, 아직은 다소 미심쩍어도 즐겁게 상상하게 될 것이다.
증세, 정책 아니라 ‘정치’와 ‘운동’
셋째, 구체적인 증세 방안으로 사회복지세 도입 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자. 이때 사회복지세는 재정지출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고 세금 사용처를 복지지출로 한정하는 ‘복지증세’, 되도록 많은 사람이 증세에 참여해 스스로 복지주체임을 자각하게 하는 ‘보편증세’, 그리고 새로 확충되는 재정의 상당 몫을 상위 계층이 책임지는 ‘부자증세’ 원칙이 담길수록 바람직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이런 사회복지세를 선보였고, 내가 재계산해 설계한 사회복지세도 있다(사회공공연구소 누리집 참조).
이때 다수의 시민이 참여하는 보편증세 채택 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는데, 실제 보편증세 방식에서 중간계층이 부담하는 추가 세금은 그리 많지 않다. 종종 보수세력들이 모든 국민이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하는 것처럼 ‘세금폭탄론’을 선전하지만, 추가 재정은 대부분 상위계층에서 나온다. 전체 근로소득자와 자영자 중 약 40%를 차지하는 소득세 면세자는 사회복지세 부과 대상에서도 제외되므로 하위계층의 추가 부담이 없고, 직접세가 누진 구조를 지니고 있어 상위계층 부담액이 훨씬 크다. 이명박 정부가 세율을 인하했을 때, 국민감세가 아니라 부자감세로 불렸듯이, 거꾸로 직접세 증세는 부자증세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 정부의 내년 예산안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증세 방안 논의가 시급하다. 복지 확대에 소극적이고 여전히 토목지출은 중시하는 정부 예산안을 비판하는 것이 기본 기조이겠지만, 올해는 대응이 만만치 않을 듯싶다. 지금까지 야당과 시민사회의 복지확충 재정 방안이던 4대강 사업이 형식상 종료되고 추가 부자감세도 철회됐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권이나 시민사회 다수는 증세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지금 이들을 비판할 이유는 없다. 표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대신 앞으로 이들이 ‘증세독배론’을 넘어설 수 있게 지금 증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증세는 정책이 아니라 ‘정치’이고 ‘운동’이다.
국민세금가치실현위원회! 이 기구는 국민이 지닌 재정지출에 대한 불신을 지출 개혁 의지로 전환해가는 용광로가 될 것이다. 별다른 성과 없이 각개약진하는 보편복지 세력의 재정 방안 논의를 교통정리할 신호등이기도 하다. 지출구조 개혁은 보편복지 세력이 모두 동의하는 과제이므로 조속히 위원회를 설립하자.
복지 체험 애플리케이션 확산! 이 활동은 보편복지 꿈을 함께 확인해가는 희망선이다. 거리 홍보 탁자 위에서, 집 컴퓨터 책상 위에서, 시민들은 자신이 받게 될 복지급여와 부담할 세금을 곰곰이 따져보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자신이 더 내야 할 돈이 적다는 사실에, 내가 받을 복지급여가 상당하다는 것에 놀랄 게다. 재미있고 행복한 미래 체험 놀이다.
세금폭탄론에 ‘세금정의론’으로!
사회복지세 도입을 위한 복지국가 촛불! 이는 보편복지를 바라는 시민들이 직접 복지국가 건설자로 나서는 실천장이다. 보수세력의 세금폭탄론에 대해 가장 강력한 대응은 ‘그래, 내가 1천원, 5천원을 더 낼 테니 당신들도 소득 능력에 맞게 10만원, 50만원을 내라’며 안전핀을 뽑고 ‘세금정의론’의 이름으로 폭탄을 저쪽으로 되던지는 것이다.
보편복지를 원하는가? 복지재정을 마련하겠다는 두 가지 길이 제시돼 있다. 증세의 길을 가도록 강력히 권한다. 시민들이 복지재정을 확충하는 실질적인 경로를 공유하고 증세운동의 주체로 나서도록 지혜를 모으자.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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