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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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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재정전략으로 복지국가를 상상하라

노무현 정부가 만들고 이명박 정부가 악용하는 ‘재정전략회의’ 복지 지출 억제 나선 MB 재정전략에 대안적 재정전략으로 맞서야
등록 2011-05-05 11:57 수정 2020-05-03 04:26

지난 4월23일 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이명박 대통령과 모든 장관이 모여 향후 재정 운용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다. 사실상 여기서 내년 예산안의 기본 골격이 정해지기에, 우리나라 예산 편성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회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당시는 경기 과천 공무원연수원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이 넥타이를 풀고 주말 1박2일 동안 진행됐다.

획기적인 전략적 재정 배분 시스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달리 재정에 관심이 많았다. 경제권력을 재벌에 넘기고 나니 행정권력이 의지할 수단은 재정뿐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는 재정을 재정답게 사용하고자 2006년에 국가재정법을 만들었는데, 재정 운용에 ‘전략’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당시까지 우리나라 예산 편성은 각 부처가 항목별 예산안을 작성해 제출하면 이후 예산 부처인 기획재정부가 이를 내년 세입 규모에 맞춰 조정하는 ‘상향식’(Bottom-up) 방식으로 진행됐다.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올해 지출 체계가 다음해에 그대로 반복되기에 행정부의 국정 전략이 예산 편성에 개입하기 어려운 구조다. 사실상 부처에서 단위사업을 담당하는 서기관과 사무관들이 내년 예산안을 마련하면 대통령이 사후적으로 재가하는 식이다.

» 노무현 정부는 다음해와 향후 5년간 재정 운용의 기본 전략을 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재정전략회의다. 지난 4월23일 경기 과천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2011년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노무현 정부는 다음해와 향후 5년간 재정 운용의 기본 전략을 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재정전략회의다. 지난 4월23일 경기 과천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2011년 국무위원 재정전략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예산안의 큰 골격을 정하고 싶어했다. 그래야 국정과제를 재정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 개의 부처 사업들을 아래로부터 모아 정부총지출을 짜는 방식이 아니라, 위에서 국정 분야별 지출 규모를 정하고 이 범위 안에서 아래로 단위사업들을 조정해나가는 ‘하향식’(Top-down) 방식을 도입했다.

정부 역할에 대한 시대적 변화도 재정 운용 체계를 바꾸게 한 요인이다. 이전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해 정부가 산업 주체로 자임했지만, 이제 정부가 할 수 있는 구실이 재정 영역으로 좁아지자 국정 전략을 재정 운용에 담기 위해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대신해 중기재정운용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에서 다음해와 향후 5년간 재정 운용의 기본 전략을 정하는 시스템이 갖춰졌는데,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재정전략회의다. 이 회의에서 다음해 분야별 지출 규모와 부처별 총액, 그리고 녹색성장 사업,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정사업의 예산 규모가 정해지면, 각 부처는 배정받은 한도 내에서 사업을 조정해나간다.

아직까지는 재정전략회의가 중요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지만, 우리나라 재정 운용에서 전략적 재정 배분이 도입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앞으로 이 방식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재정전략회의의 역할은 훨씬 커질 것이며, 특히 이전과 성격이 다른 세력이 집권할 경우, 기존 예산 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면 재정전략회의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집권을 염두에 둔 진보세력이라면 무엇보다 재정전략회의를 눈여겨봐야 한다.

이번에 열린 ‘2011년 재정전략회의’가 설정한 핵심 과제는 ‘지속 가능한 재정’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초반 재정전략회의에서 내세운 핵심 과제는 ‘선진일류국가 건설’(2008), ‘경제 재도약과 미래 대비’(2009) 등 성장지원형 목표였다. 그러나 2010년부터는 ‘지속 가능한 재정건전성’(2010), ‘지속 가능한 재정’(2011) 등 재정건전성이 핵심 과제로 등장했다. 국가재정이 미래 국정 영역을 확장하는 적극적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재정건전성’이라는 관리적 구실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재정전략회의 결과를 보자. 재정전략에는 정부가 추진할 핵심 과제가 명시되고, 이어 재정관리·세입·지출 등 세 가지가 다뤄진다. 재정관리에선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재정지출 증가율을 수입 증가율에 비해 2~3% 낮게 유지하는 재정준칙을 강조했다. 곧, 재정 적자 축소가 최고의 목표다. 세입 분야에선 탈루소득 과세, 불합리한 비과세 감면 정비 등 세입 기반 확충을 제시했다. 즉, 일반적인 세입 인프라 개혁 과제가 열거될 뿐, 논란의 핵심인 부자 감세는 유지하고 재원 확충을 위한 세제 개편은 제외되었다. 지출 분야에선 무상복지 등 재정 포퓰리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즉, 무상복지와 같은 무분별한 지출 증가를 억제하겠다는 선언이다.

» 진보적 대안재정전략을 위해선 지출 개혁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과도한 국방비를 줄여나가야 한다. 한국의 국방비 지출은 재정지출의 9.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4%의 3배에 육박한다. 지난 3월7일 한-미 연합 훈련인 키리졸브의 일환으로 경기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스트라이커부대가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 진보적 대안재정전략을 위해선 지출 개혁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과도한 국방비를 줄여나가야 한다. 한국의 국방비 지출은 재정지출의 9.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3.4%의 3배에 육박한다. 지난 3월7일 한-미 연합 훈련인 키리졸브의 일환으로 경기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스트라이커부대가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부자감세 고수하는 MB 재정전략

올해 재정전략회의를 보며 마음이 무겁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든 ‘재정전략’ 칼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재정 구조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다음 두 가지가 핵심 문제다.

첫째, 재정전략회의는 재정건전성에 대한 원인 진단 없이 ‘지출 분야’에서 해법을 찾고 있다. 재정전략회의는 향후 의무지출의 경우 ‘PAYGO’(Pay-as-You-Go) 원칙을 통해 지출 증가를 억제하겠다고 밝혔다. 의무지출이란 국민연금·최저생계비·보육료 등 법령으로 전해진 정부 사업을 의미하고, PAYGO는 재정지출을 세입 충당 여부와 연동하는 원칙이다. 이는 앞으로 재정 방안이 마련돼야만 복지 관련 법령을 도입하고, 심지어 이미 정해진 의무지출의 경우에도 재원 방안이 미흡하면 제도 개정 조처를 취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재정건전성 문제가 제기되는 근원 원인은 지출 과잉보다는 세수 과소에 있다. 2011년 한국의 국가재정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3.6%에 비해 무려 15.6%포인트가 작다. 금액으로는 올해 예상 GDP 1240조원을 적용하면 부족액이 190조원을 넘는다.

우리나라에서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려면 지출 통제를 강요하는 사후적 대응보다는 세입을 늘리는 것이 정공법이다. 2008년 기준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포함한 우리나라 국민부담률은 2008년 GDP의 25.8%로 OECD 평균인 34.8%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부자 감세로 매년 20조원의 세수 감소를 유발해놓고 재정건전성을 명분으로 이 과오를 지출 통제를 통해 수습하고자 한다. 원인과 동떨어진 해법을 내놓고 있다.

둘째, 이명박 정부는 복지 지출에 대한 시대착오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 재정전략회의는 근래 부상하는 무상복지 민심을 재정 포퓰리즘이라 비판한다. 필자의 추계로 올해 우리나라 복지 지출은 GDP의 약 9%로 OECD 평균 19%에 비해 턱없이 낮다. 가구총지출 중 국가나 지자체로부터 받는 몫을 가리키는 사회임금을 보면, 우리나라는 2010년 15%로 OECD 평균 32%, 스웨덴 49%에 비해 부끄러운 수준이다. 기업에서 해고돼 시장임금을 받지 못하면 가구 지출의 85%를 잃어야 하는 정글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복지에 대한 민심의 변화가 확연하다. 국민의 복지 요구는 자연스러운 시대 흐름이며, 국가가 필요 재정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이명박 정부는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지출 개혁과 증세를 포함한 복지 재원 논의를 경청하고, 복지 확대 프로그램을 마련해나가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재정전략회의에서 핵심 과제로 내세운 재정건전성은 내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포석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 2012년 가을에 재정균형을 담은 2013년 예산안을 발표할 것이다. 금융위기를 맞아 다른 선진국들이 여전히 재정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이룬 성과라고 홍보하면서 말이다. 야권 후보가 제기할 ‘복지 지출 확대’를 ‘재정 포퓰리즘’으로 비판하며 ‘재정균형’ 성과를 대항 카드로 내겠다는 계산이다.

정부가 ‘재정전략’을 펼치듯이, 진보세력도 미래 비전을 담은 대안재정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까지 재정 이슈는 정부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시점을 전후해서야 떠올랐고, 시민사회도 정기국회에 맞춰 대응 활동을 벌였다. 이제는 재정전략회의가 열리는 봄부터 바삐 움직여야 한다.

‘복지확충특별회계’ 신설할 필요

진보적 대안재정전략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까? ‘재정관리’ 영역보다는 ‘재정사업’을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심이 보편 복지를 요구하는 시대적 전환점에 서 있다. 복지 확대를 전면에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재정건전성 문제는 재정수입 확충을 통해 해소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설득력 있는 재원 방안을 마련하고 국민이 이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복지재원 논의가 성과를 거둔다면 이것이 바로 대안재정전략의 세입 분야에 담길 내용이다.

지출 개혁도 중요하다.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과도한 국방비를 줄여나가야 한다. 2006년 정부총지출에서 경제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 21.3%는 OECD 평균 10.6%의 2배 수준으로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대부분이 대기업 지원,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속하는 경제 예산을 복지 분야로 전환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도 재정지출의 9.2%로 OECD 평균 3.4%에 비해 3배에 육박한다.

덧붙여 ‘복지 지출 확대’를 꾸준히 실행하려면 ‘복지확충특별회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기존의 예산 배정 방식으론 종전 수준을 넘기 어렵다. 복지 지출이 일정 단계(예: OECD 평균)에 이를 때까지 특별회계를 통해 복지 재원을 확보해나가자. 만약 사회복지목적세가 제정된다면 복지확충특별회계의 주요 재원이 될 것이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재정 의제는 더욱 부상할 듯하다. 이명박 정부의 재정전략이 변하지 않고 보편복지 세력이 계속 약진한다면, 내년 대선에서 지출 관리를 통해 재정균형을 달성하겠다는 보수의 ‘재정건전성’ 프레임과 재원 확충을 통해 보편 복지를 구현하겠다는 진보의 ‘복지 확충’ 프레임이 격돌할 것이다. 여기서 진보세력이 이겨야 한다. 그래서 보편복지를 약속한 정치세력이 집권한다면 대한민국 재정 운용은 새로운 역사적 장을 맞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련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악용하고 있는 ‘재정전략’이라는 칼이 진가를 발휘할 차례다. 당장 내후년인 2013년 봄, 진보 정권은 300조원이 넘는 재정을 어떻게 사용할까? 진보주의자라면, 대안재정전략으로 미리 복지국가를 만들어보는 즐거운 상상을 누려보자.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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