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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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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물어야 할 4가지 질문

복지재정·인프라 문제, 일자리 안정화, 복지동맹 등에 대해 복지를 이야기하는 후보들은 구체적 대안으로 답해야 한다
등록 2012-01-12 02:04 수정 2020-05-02 19:26

2012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복지국가 꿈을 꿔도 좋을까? 대통령 선거일 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올해는 나라를 운영하려는 사람마다 자신의 핵심 공약으로 복지국가를 내걸 것이다. 이에 일부 진보 진영에선 복지국가로는 정치세력들의 차이가 구별되기 어려우므로 계급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다른 의제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경제민주화, 녹색 가치처럼 대한민국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고, 진보적 정체성을 내세울 수 있는 의제임이 틀림없다. 아직까지 논점이 충분히 드러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복지국가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려면 알을 깰 만큼의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복지국가를 바라는 강렬함만큼 복지국가가 지녀야 하는 조건을 후보들에게 따져물어야 한다.

2012년은 정치의 해다. 대통령 선거일 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2007년 8월2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와 다른 후보들이 꽃다발을 들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운식

2012년은 정치의 해다. 대통령 선거일 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2007년 8월2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와 다른 후보들이 꽃다발을 들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윤운식

복지국가 정의가 다양한 까닭

복지국가를 정의하는 방식이 학문마다 다르다. 사회복지학자는 ‘시민들의 기본 삶이 보장되는 보편복지 체제’라고 말할 것이다. 그에게는 복지 정책이나 제도가 큰 관심이다. 경제학자는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는 케인스주의 경제체제’라고 답할 것이고, 정치사회학자는 복지국가가 형성·유지되는 정치 과정에 주목하므로 ‘복지 확대를 공통 이해로 지닌 세력들의 복지동맹 체제’로 설명할 것이다.

20세기 중반을 지나 복지국가가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비판적 목소리도 이어졌다. 여성학자는 정통적 복지국가가 남성가구주를 생계 모델로 삼고 있기에 남성부양자 체제라 하고, 생태주의자는 복지국가가 여전히 인간 중심의 성장주의 체제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처럼 복지국가에 대해 학문마다 다양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복지국가가 자리잡기 위한 조건이 복합적임을 뜻한다.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시절, 나는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라고 여러 번 성명서에 적었다. 그런데 솔직히 스스로 이 문구를 체감하기가 어려웠다. 시민들이 복지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겼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라는 건 자신이 시장 경쟁에서 패했다는 것을 방증했고, 공공임대주택 단지에 산다는 이유로 자식들은 기가 꺾였다. 선별복지 체제가 낳는 낙인 효과다. 다행히 근래엔 보편복지 담론이 부상하고 무상급식·무상보육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복지를 적극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에 필요한 조건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첫째 조건은 ‘복지재정 확충’이다. ‘제한된 예산’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선별복지 세력을 논외로 치면 보편복지 진영에는 두 의견이 존재한다. 하나는 증세 없이 복지재정을 확충하겠다는 옛 민주당의 입장이다. 우리나라에서 토목 지출 절감, 비과세 감면 축소 등 ‘증세 없는 지출 개혁’으로 마련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약 30조원이기에 이 규모에 맞춰 보편복지 프로그램이 제시된다. 다른 하나는 진보 진영의 증세론이다. 진보 진영과 사회단체가 요구하는 복지 요구액을 합산하면 대략 60조원 안팎이기에 지출 개혁을 통해 조달하는 30조원과 별도로 30조원의 증세가 요청된다. 민주당이 확보 가능한 재원 규모를 먼저 계산하고 여기에 맞춰 복지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면, 진보 진영은 복지 요구액을 먼저 정한 뒤 재원 방안을 설계하는 과정을 밟는 셈이다.

두 견해는 각각 장단점이 있다. 비증세론은 증세에 따른 정치적 위험을 회피하지만, 한나라당 후보로 유력시되는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상당한 규모의 복지재정을 내놓을 경우 보편복지 세력으로 정체성을 고수하는 데 곤란을 겪을 수 있다. 반면 진보 진영은 복지 민심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강점이 있지만, 대한민국 곳곳에 뿌리내린 증세 장벽을 돌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우리 몫이다. ‘포괄적이고 당위적인 수준을 넘어 당신이 가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출 개혁 방안은 무엇인가? 비증세론은 박근혜 복지재정론과 질적 차이가 있는가? 진보정당의 증세 방안은 실행 가능한가?’

2007년 11월12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을 위해 국회 귀빈식당에서 연 4자회담에서 오충일 통합신당 대표, 정동영 후보, 이인제 후보, 박상천 대표가 손을 잡았다(오른쪽부터). <한겨레> 강재훈

2007년 11월12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을 위해 국회 귀빈식당에서 연 4자회담에서 오충일 통합신당 대표, 정동영 후보, 이인제 후보, 박상천 대표가 손을 잡았다(오른쪽부터). <한겨레> 강재훈

재벌체제 혁신과 복지국가의 문제

둘째 조건은 ‘복지 인프라 공공화’다. 복지서비스는 공공과 민간 어느 쪽이 공급하느냐에 따라 관리 비용이 다를 수 있다. 민간이 제공해야 ‘경쟁’ 효율성이 생긴다는 시장논리도 존재하지만, 최소한 복지 영역에선 시장이윤을 지급하지 않는 공공 인프라의 강점이 경험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민간병원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이 총의료비에 국내총생산(GDP) 17%를 쏟고 있는 데 비해, 공공병원이 주축을 이루는 영국은 GDP 10%로 더 알찬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지 인프라는 지나치게 민간에 의존하고 있다. 공공복지 인프라 비율이 보육 20%, 의료 8%, 주거 4%, 요양 2%에 그친다. 일정한 수익을 제공해야 하고 통합적 관리가 수월하지 않은 민간 중심의 복지 인프라를 가지고 앞으로 천문학적 금액의 복지비용이 소요될 고령화 시대를 맞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복지 인프라의 공공화는 복지재정 관리뿐만 아니라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확충하는 사회통합적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글로벌 재정위기 상황에서 북유럽 국가들이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 복지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공적 사회서비스 복지 덕택임을 주목해야 한다.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후보는 대답해야 한다. ‘현재 민간 중심의 보육·의료·주거·요양 인프라를 언제까지 어떻게 공공으로 전환할 것인가?’

셋째 조건은 ‘일자리 안정화’다. 애초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시작됐을 때의 전제는 완전고용에 가까운 노동시장이었다. 시민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통해 기본 생활을 영위하는 토대 위에서 이들이 낸 세금으로 재분배 기능을 가진 복지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복지재원이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복지지출도 지속 가능한 수준에서 관리될 수 있다는 기획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 처지에 있다.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는 다수가 빈곤에 시달리고, 사회보험의 사각지대까지 겹쳐져 복지 수요가 커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가 지속 가능한 체제로 작동하려면 양적으로는 고용률을 높여야 하고, 질적으로는 정규직·비정규직의 이중 시장구조를 해소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노동자 사이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고, 복지국가의 사회서비스 부문도 일자리 확충에 순기능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다수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자리 안정화의 관건은 중소기업의 지급 능력 강화에 있다. 결국 비정규직 해법은 경제적 성과를 독과점하는 재벌 대기업 체제를 혁신하는 과제가 된다. 복지국가 후보에게 묻자. ‘당신은 노동자 내부의 일자리 나누기를 실현할 방안을 지니고 있는가? 공존의 경제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재벌 대기업 체제를 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올해는 나라를 운영하려는 사람마다 핵심 공약으로 ‘복지국가’를 내걸 것이다. 옥석을 가릴 때다. 지난 17대 총선에 나선 한 후보자의 거리 유세를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올해는 나라를 운영하려는 사람마다 핵심 공약으로 ‘복지국가’를 내걸 것이다. 옥석을 가릴 때다. 지난 17대 총선에 나선 한 후보자의 거리 유세를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점진 vs 도약 , 복지 한국의 경로는?

넷째 조건은 ‘복지동맹 형성’이다. 복지국가는 자신을 건설하고 운영할 세력들의 동맹을 만들어야 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진보정당, 노동조합, 풀뿌리 시민네트워크 등이 복지동맹의 핵심 주체였다. 우리나라에선 진보정당이 약하고 노동조합은 복지운동에 소극적이며, 약 60만 명의 사회복지사가 존재한다지만 지역사회의 복지 활동은 형식적인 복지 전달 수준에 머물고 있다. 보편복지 열풍이 불자 지난해 복지국가만들기국민운동본부, 복지국가실현연석회의 등이 결성됐지만 의미 있는 활동은 선보이지 못했다.

국내 복지국가 연구자일수록 대한민국의 복지국가 진입에 회의를 표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복지동맹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넘어야 할 과제다. 대선에서 복지국가 후보가 승리하는 것이 대한민국 복지 발전에 큰 계기가 되겠지만, 집권 이후 복지 프로그램을 실제로 집행하려면 단순히 득표수의 우위를 넘어 대중적 복지운동을 밑거름으로 당선돼야 한다. 그래야 복지국가 공약에 숨결이 부여되고, 반복지 세력의 저항도 넘어설 수 있다. 후보에게 물어야 한다. ‘어떻게 노동자와 시민을 단순한 투표자의 지위를 넘어 복지국가 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할 것인가? 당신은 이를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가?’

스웨덴의 복지국가 건설에 중추적 역할을 한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복지국가를 ‘잠정적 유토피아’로 이해했다. 인류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지만 그곳을 향해 가는 정거장으로서 시대적 장벽을 헤쳐나가는 실험장이다. 이제 우리도 복지국가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자식들이 누려야 할 실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올해 대선에서 앞에서 제기한 질문들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답을 가진 후보를 만나고 싶다.

이 질문들의 답을 모으면 대략 두 가지 복지국가 경로를 선보일 수 있다. 하나는 비증세 지출 개혁을 통해 복지재원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차기 정권에서 유의미한 복지 체험을 공유한 뒤, 이것을 에너지로 본격적인 복지국가로 발전해가자는 ‘점진 경로’다. 또 하나는 올해 부자증세와 보편증세, 복지 인프라 개혁, 경제민주화 요구 등을 전면화하고 집권 초기부터 복지를 대폭 확장하자는 ‘도약 경로’다. 후자에는 보편복지를 바라는 시민, 복지 전달자인 사회복지사, 하루가 힘든 비정규노동자와 자식의 미래가 걱정스러운 정규직노동자까지 복지국가 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하자는 대중적 복지동맹 운동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막연함 너머 구체적 논의 만개하길

많은 사람들이 다녀야 등산로가 생기는 법이다. 아직 어떤 경로라고 정하기는 이르지만, 이를 위한 논의가 치열하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나는 올해처럼 복지 민심이 팽창하고 그것을 구현할 정치적 계기가 존재하는 시기에는 ‘도약 경로’가 힘을 얻으면 좋겠다. 증세 없이 지출 개혁만으로 복지국가 길을 개척하겠다며 큰소리를 치다가 최근 소비세 인상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일본 민주당의 사례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당장은 점진 경로가 무난해 보이지만, 지출 개혁마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는 논의로 임기를 허송해버릴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올해 대선은 역대 어떤 때보다 희망이 가득하다. 이명박 정부 시대를 끝내는 속 시원함도 있지만 복지국가라는 미래 좌표가 앞에 놓여 있다. 올해 1년, 막연한 복지국가 공약을 넘어 구체적인 조건과 실행 경로에 관한 논의가 만개하길 바란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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