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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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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내라’에서 ‘우리도 내자’로

의료·노후·보육·교육 등에 복지국가 견줄 만큼 지출하는 한국인들…시민의 보편증세운동 참여로 부자들 압박하는 에너지 만들어야
등록 2011-07-01 13:09 수정 2020-05-03 04:26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 것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다녀왔다. 각 정당의 보편복지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앞에 붙은 형용사가 창조형·평화중심·사회연대 등으로 다를 뿐,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 모두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복지국가 논의를 접하며 ‘어떤’보다는 ‘어떻게’를 더 생각한다. 스웨덴형이든 독일형이든, 나라별로 조세부담률과 복지 지출이 얼마나 차이가 나든, 내가 찾는 것은 ‘그들은 어떻게 복지국가를 이루었고, 또 우리는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다.

민간 의료보험료 33조원을 무상의료 재원으로

복지국가 하면 보통 떠올리는 국가가 스웨덴이지만, 최소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엔 도달해야 한다는 기대가 높다. 그러면 바로 반론이 등장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인 우리나라와 5만달러(스웨덴)·4만달러(OECD 평균)인 나라들을 비교할 수 없지 않은가?‘라고. 그렇다면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경제력을 지녀야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의료비를 보자. 우리나라 국민이 지난해 청구받은 의료비가 총 57조원(비급여 포함)이고, 이 중 국민건강보험이 지불한 금액은 34조원이다. 그래서 지금 보장성이 60%에 머물고 있다. 만약 완전 무상의료가 목표라면, 국민건강보험이 부족분 23조원을 더 확보해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이 23조원이 없는가? 보험의료학계 자료를 보면, 2008년 우리나라 국민이 민간 의료보험에 납부한 보험료가 33조원에 이른다. 이미 우리나라 국민은 국민건강보험료와 민간 의료보험료를 합해 총 67조원, 즉 완전 무상의료에 필요한 비용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 지난 1월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복지 재원 토론회 ‘복지는 세금이다’가 열렸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와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정동영 민주당 최고의원(왼쪽부터). 진보신당 제공

» 지난 1월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복지 재원 토론회 ‘복지는 세금이다’가 열렸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와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정동영 민주당 최고의원(왼쪽부터). 진보신당 제공

노후 대비 비용을 보자. 현재 우리나라 국민연금 급여가 충분치 않다. 20년 가입하면 자기 소득의 20%를 지급받는데, 월 200만원 소득자라면 노후에 40만원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 국민연금이 취약한 근본 원인은 낮은 연금보험료에 있다. 우리나라 국민연금 보험요율은 소득의 9%(노사 절반씩)인데, OECD 국가 평균 보험요율은 총 19.6%(노 8.4%, 사 11.2%)로 우리의 2배가 넘는다. 다른 나라 국민은 후한 연금 급여만큼 공적 연금보험료도 많이 내고 있다.

올해 국민연금이 거둔 연금보험료 수입이 사용자 몫을 합해 총 26조원이다. 그런데 국민이 민간 생명보험회사에 낸 보험료 총액이 무려 90조원에 육박한다. 국민연금에 납부하는 노후 대비 금액보다 3배 이상 많은 돈이다. 의료비처럼, 우리는 노후연금에도 상당한 돈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대부분을 공공복지가 아니라 시장복지에 지출하고 있을 뿐이다.

요사이 보육지원비가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 부담이 만만치 않다. 공공 재정과 가계 부담 몫을 합친 총 보육 비용이 상당하다. 대학 재단의 불투명한 회계 관리를 잠시 논외로 하면, 대학생들이 높은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는 이유도 OECD 국가들이 GDP 1.9%의 공공 재정을 고등교육에 지출하는 데 비해 한국은 단지 GDP의 0.5%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의료·노후·보육·교육 등 기본 복지에 사용되는 돈의 총액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복지국가에 견줄 만큼의 돈을 지출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공공복지 몫이 작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보편복지가 미흡한 이유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장복지로 지출되는 비용이 공공복지로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수행할 사회적 힘이 약한 탓이다. 실제 서구 국가들이 오래전에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력에서 복지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보 정당, 노동조합, 시민사회 등 강력한 복지 주체가 있었다. 복지국가 건설, 이것은 ‘비용 전환’의 문제이고, 여기서는 ‘경제력’이 아니라 ‘정치력’이 관건이다.

복지국가에 대항할 견고한 기득 세력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에 대항할 기득 세력은 견고한 편이다. 무상의료가 가시화되면, 민간 의료보험회사들이 생사를 걸고 반대할 것이고 진료 행위에 대한 공적 통제가 강화될 것이기에 의료계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적연금은 민간 생명보험회사 장벽에 도달하기 이전에 자체 불신을 해결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복지 재정을 위한 세금과 사회보험료는 소득에 따라 누진 혹은 비례로 부과되기에 고소득 계층일수록 반발할 것이다. 보수 언론은 세금폭탄론으로 일반 시민을 협박하고 부자를 엄호할 것이다.

반면에 복지 주체는 정치권을 넘어서면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절박한 처지에 몰린 장애인·빈민·환자 단체만 외로운 목소리를 내왔다. 향후 복지국가 세력이 집권하고 기득세력의 저항을 이겨내며 복지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면 대중적 복지 주체가 필요하다.

복지 재정 의제를 매개로 복지 주체 형성 운동을 벌일 수는 없을까? 복지 재정은 모든 복지 당사자의 공통 과제이자 근래 복지국가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오랫동안 구조의 문제로 방치돼온 재정 개혁을 사회의 관심거리로 부각시켰고, 더 중요하게는 ‘제한된 재원’을 고집하는 대한민국 주류 세력을 ‘반대’를 외치는 수세적 위치로 몰아놓고, 복지 재정 확충 세력을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전향적 고지로 올려놓았다.

 지난 20년간 스웨덴 경제는 성장·안정·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영국이나 미국, 독일보다 더 뛰어난 실적을 보여줬다. 튼튼한 복지 시스템은 스웨덴의 또 다른 강점이다. 보육시설의 70%가 공립인데다 무상인 스웨덴의 한 공립 보육시설에서 보육교사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한겨레 김소연

지난 20년간 스웨덴 경제는 성장·안정·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영국이나 미국, 독일보다 더 뛰어난 실적을 보여줬다. 튼튼한 복지 시스템은 스웨덴의 또 다른 강점이다. 보육시설의 70%가 공립인데다 무상인 스웨덴의 한 공립 보육시설에서 보육교사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한겨레 김소연

앞으로는 어떨까? 7월에 민주당이 ‘보편복지를 위한 종합재정방안’을 발표할 예정인데, 내 판단으로는 몇 차례 공방 이후 복지 재정 논쟁이 잠잠해질 개연성이 크다. 각 재정 방안의 현실성 여부가 집권 이전에는 검증될 수 없는 것이기에 ‘내가 집권하면 가능한 주장’들로만 선언될 뿐, 후속 논의가 확대재생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복지 재정 의제가 정치권을 넘어 대중적 복지국가운동의 영역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나는 복지 지출과 세금을 연계해 추진하는 복지증세운동에 관심이 많다. 복지 재정은 지출 개혁과 증세라는 두 바퀴를 모두 필요로 하는데, 지출 개혁은 무수한 개별 사업들로 구성되고 집권 이전까지는 ‘설계도’로만 존재하는 반면에 증세는 재원 규모가 명확하게 도출되고 국민이 민감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대중적 의제가 될 수 있다. 조세 저항에 지혜롭게 대응하며 복지 재정 확충을 위한 증세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자.

세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민주당 주류처럼 가능한 한 ‘증세 없이’ 복지 재정을 마련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에게만 증세’하겠다는 진보 정당의 방안이다. 양자가 증세 여부를 둘러싸고 견해 차이가 크지만, 보수 세력이 제기하는 세금폭탄론을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길은 민심의 보편복지 열망을 토대로 시민이 스스로 복지 재정 마련에 나서는 ‘참여재정운동’이다. 이는 부자와 대기업에 복지 재정을 요구하는 ‘내라!’를 넘어 시민이 직접 ‘내자!’(낼 테니 내라)로 나가자는 보편증세운동이다.

복지국가세로 매년 35조 재원 마련 가능

재정 지출 불신, 과세 형평성 한계 등을 이유로 보편 증세가 시기상조라는 우려가 있지만 현재의 복지국가 정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지형을 확장해나가야 한다. 근래 ‘복지가 늘어난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여론조사기관에 따라 수치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동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특정인에 대한 선호 조사가 아니라 자신의 ‘참여’를 묻는 질문이기에, 여기서 증가 수치가 갖는 역동성은 매우 크다.

특히 ‘내자’는 복지국가 논의에서 ‘관람자’로만 서 있던 시민을 ‘행위자’로 역할을 전환시켜 대중적 복지 주체가 형성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시민이 스스로 재원 마련에 참여해 자긍심을 확보하고 부자들을 압박하는 에너지를 만들어갈 수 있다.

보편 증세가 부자 증세 원리와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보편 증세는 기존 과세자들을 모두 복지 증세의 대상으로 삼지만, 확보되는 재원 대부분은 상위계층 몫이다. 구체적으로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상징적 세목으로 사회복지세를 설계하면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이 세금은 상위계층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조승수·정동영 의원의 사회복지세와 달리 모든 과세자에게 자신이 납부한 직접세액의 10~30%가 부과된다. 근로자의 경우, 기존 면세자 580만 명(근로인구의 약 40%)은 부담이 없고, 연소득 2천만~3700만원 근로자 540만 명(근로인구의 38%)은 자신에게 부과된 근로소득세 연 12만원의 10%인 1만2천원을 매년 사회복지세로 낸다. 대신 소득세를 많이 납부하는 나머지 상위계층 22%는 연 10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사회복지세를 내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득세·법인세·상속증여세·종합부동산세 등 직접세와 고가품에 부가되는 개별소비세(옛 특별소비세)에 사회복지세를 매기면 연 20조원의 재원이 확보될 수 있다. 또한 가입자들이 월평균 1만1천원의 건강보험료를 더 내자는 ‘건강보험 하나로’도 ‘내자’ 운동에 속한다. 가입자 인상분만큼 사용자와 국가 몫이 증가하고, 피부양자 요건 등 건강보험료 체계 개편까지 덧붙여지면 매년 15조원씩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늘어난다.

사회복지세 제정과 건강보험료 인상이 복지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는 점에서 양자를 ‘복지국가세’로 부른다면, 매년 35조원을 조성하는 ‘내자! 복지국가세’ 운동인 셈이다. 사회복지세는 국회 입법 과제이고, 건강보험료는 매년 11월 가입자·의료공급자·공익위원 3자가 참여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투표로 결정되는 사안이다. 양자의 실현을 위한 거리 서명, 촛불 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복지국가 재정을 마련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이 대중적 복지 주체로 커나갈 것이다. 이는 시장복지로 지출되는 비용을 공공복지로 돌리고, 풀뿌리 시민을 관람자에서 행위자로 바꾸는 이중의 ‘전환’ 운동이다.

이제 시민과 노동자가 나서야

이제부터는 정치권이 아니라 시민이 복지국가 논의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민과 노동자가 합심해 ‘복지국가 건설 5개년계획’ 비전을 마련하고, ‘어렵게 사는 나도 낼 테니 여유 있는 당신들도 능력만큼 내라’고 외치자. 그래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복지국가로 만들 수 있을까?’라고 누가 묻는다면, ‘내자’ 운동으로 복지 재정을 마련하고 복지 주체를 형성하며, 마침내 복지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대답하자.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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