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9일 국회에서 ‘복지예산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의원, 교수, 사회단체 대표들이 라운드 테이블에 앉았다. 토론 중간에 사회자가 ‘복지예산 배정의 우선순위’를 패널들에게 물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나온 연구위원은 기초생활보장 빈곤계층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여성 국회의원은 보육시설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토로하고, 발언권을 얻은 어르신은 노인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간청했다. 모두 자신이 다루는 주제나 집단의 특성을 강조했다.
아쉬운 ‘암부터 무상의료’ 논쟁
방청석에서 토론을 지켜보며 자문해보았다. ‘내가 이 질문을 받는다면?’ 금세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지 분야 곳곳이 나름의 절박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디부터 예산을 배정하지?
이때 갑자기 패널로 참석한 한 국회의원이 보편 복지를 공격했다. ‘지금 당장 생활이 곤란해 복지가 필요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모두에게 혜택을 주자는 보편 복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사용할 돈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나라가 중간계층 이상, 심지어 부자들에게까지 복지를 제공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예산의 한계를 강조한 대목은 적절한 지적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보편 복지를 부정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나는 왜 보편 복지를 지지하는가?
2005년에 ‘암부터 무상의료’라는 구호가 사회의 주목을 끈 적이 있다. 당시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서면서 추가로 급여 확대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이 1조3천억원에 달했다. 과연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2005년은 민주노동당이 ‘부유세, 무상의료’ 공약에 힙입어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이듬해다. 보건의료 부문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일부가 ‘암부터 무상의료’를 주창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암’부터 획기적으로 보장성을 확대하고, 이후 다른 질병으로 급여를 넓혀 우리나라에서도 무상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제안이다. 이 주장이 알려지자 국민이 큰 호응을 보였고, 언론과 정치권도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무상의료 추진 세력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질환별 형평성이 도마에 올랐다. ‘다른 중증질환도 있는데, 왜 암부터냐?’ 더 강력한 비판은 ‘질환별’ 무상의료 대신 ‘저소득층’부터 무상의료를 추진해야 한다는 진보 정당 정책팀의 주장이었다. 원내 진출 이후 영향력이 커진 민주노동당은 당시 ‘1단계 하위 10%, 2단계 하위 30%, 3단계 모든 계층’이라는 무상의료 3단계 로드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로드맵에 따르면 추가 재원은 저소득계층에게 집중돼야 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암부터 무상의료’는 애초 뜻한 만큼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일부 암 관련 보장성이 높아졌지만 ‘암’을 지렛대로 다른 질환으로 무상의료를 넓혀간다는 애초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건강보험의 보장성은 60% 선에서 계속 머물러 있고, 국민의 병원비 부담을 상품으로 활용한 민간의료보험은 급속히 커가고 있다.
지난 2009년 경기도 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무상의료, 혁신학교 등의 공약을 내건 김상곤 후보가 당선되었다. 보수세력이 지배해 온 교육행정에서 진보 실험이 가능할지 관심이 쏟아졌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충남·충북·전북·제주 등 5개 광역지역에서, 경기도에선 8개를 제외한 31개 시·군에서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이 시행되고 있다. 심지어 무상급식은 아이들 한 끼 점심 차원을 넘어 보편 복지, 복지국가 열풍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전면 무상급식이 낳은 복지 열풍
경기도 교육청이 2010년 예산안을 편성할 당시, 김상곤 교육감을 도와주는 정책조언그룹은 두 가지 무상급식 방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저소득계층부터 무상급식을 적용하는 방안이고, 또 하나는 5~6학년 학생들에게 먼저 무상급식을 제공하고 다른 학년으로 확대하는 방안이다. 전자를 택한다면, 한나라당이 지배하고 있는 도의회와 갈등을 피할 수 있지만 무상급식을 전면화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후자는 무상급식을 곧바로 알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지만 도의회와 일전을 각오해야 했다.
마침내 선택은 교육감의 몫으로 남겨졌다. 김상곤 교육감은 저소득계층 아이들에게 낙인 효과를 주지 않는 보편 복지 방식으로 무상급식을 제기하자며 후자를 택했다. 대한민국 복지 역사에서 보면 정말 중요한 선택이었다.
저소득계층이나 취약집단에게만 제공되는 복지는 일종의 공공부조에 해당한다. 이러한 복지는 두 가지의 내재적 한계를 지닌다. 첫째, 일반 시민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에, 공공부조 확대를 통해서는 복지를 향한 대중적 에너지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시민들은 자신이 공공부조 대상이 아니며, 대상이 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공부조가 증가하면 내 세금이 늘어날까 우려한다. 공공부조를 멀리하며 복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얻어간다.
둘째, 우리나라처럼 예산 제약 장벽이 높고 고령화 등으로 복지 수요가 점증하는 나라에선 공공부조 혹은 선별 복지로 시작한 사업은 이후에도 자연증가분을 따라잡는 수준에서 관리될 개연성이 높다. 실제 국민건강보험 지출은 기존 보장성을 유지할 만큼만 늘어나고, 최저생계비도 물가상승분 정도를 반영할 뿐 수급대상자 비중은 제도 초기 규모에서 맴돌고 있다.
만약 저소득계층 학생들부터 무상급식을 도입했다면 일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교육청의 예산 현실에서 무상급식은 가난한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 복지 틀 안에 갇혔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맞고 있는 전면적 무상급식도, 복지국가 논의도 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전히 보편 복지는 대학 강의실에서만 주고받는 개념어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암부터 무상의료’ 논란을 다시 보자. ‘왜 다른 질환은 소홀히 하는가? 저소득계층부터 지원하는 게 진보적 원칙 아닌가?’ 모두 근거가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완전 무상의료가 목적지라면 그곳으로 나아갈 힘을 만들어내는 ‘복지정치’를 숙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지근한 복지 지출 후회한 노무현
두 개의 경로가 있다. ‘저소득계층부터 의료복지 혜택을 늘리고 이것을 토대로 모두에게 무상의료를 전면화하자’, 또 하나는 ‘아예 모든 국민이 누리는 암부터 무상의료를 구현하고, 이러한 복지 체험을 바탕으로 다른 질환의 무상의료를 주창하자’. 과연 어느 길이 무상의료를 향한 대중적 에너지를 역동적으로 모을 수 있었을까?
민간의료보험을 보자. 이들은 자신을 ‘암보험’으로 포장한다. 암이 대한민국 국민이 안고 있는 병원비 걱정을 대표하는 상징 질환이기 때문이다. ‘암보험’을 통해 국민은 병원비 해결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 정당이 지녔던 ‘저소득계층부터 무상의료 로드맵’은 보편 복지를 향한 ‘정책 논리’로선 진보적 원칙에 충실했으나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복지정치’에서는 서툴렀다. 민간의료보험이 ‘암보험’을 내밀듯, 굳건히 ‘암부터’로 국민과 적극 소통해나가야 했다.
패널로 참석한 국회의원이 질타한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왜 지금 보편 복지인가?’ 내 대답은 이렇다. 첫째, 국민의 인식틀을 바꾸어내는 보편 복지의 역동적 정치를 주목하기 때문이다. 복지가 저소득계층에 대한 시혜,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모두가 누리는 권리로 자리잡으려면 너도, 나도, 모두가 복지를 자신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 이들이 복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정치세력도 이를 귀담아듣고, 보수세력조차 복지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든가 복지병을 낳는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못한다. 대한민국 복지에서 역사적 전환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둘째, 우리나라처럼 경제력은 상당하나 복지가 빈약한 곳에서는 ‘누적’보다는 ‘도약’이 복지의 발전 경로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재정 규모가 작고 국방비 같은 특수한 지출 요인이 상존해 기본 예산편성 구조 내에서는 작은 개선만 허용돼왔다. 그래서 선별 복지로 시작하면 계속 선별 복지로 머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조건에서 획기적으로 복지를 늘리려면 ‘차곡차곡’ 쌓는 방식보다는 일반 시민이 복지를 체험하는 ‘보편 복지’ 방식이 정공법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후 발간된 에서 재임 기간에 복지 지출을 화끈하게 늘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거 없이 색연필 들고 쫙 그어버렸으면 되는 건데…. ‘무슨 소리야 이거. 복지비 그냥 올해까지 30프로, 내년까지 40프로, 내후년까지 50프로 올려.’ 그냥 쫙 그어버렸어야 되는데…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234쪽) 그는 복지 열망을 강하게 품었지만, 보편 복지가 지닌 정치적 역동성을 자신하지 못했다. 일반 시민을 복지의 체험자로 만들지 못했고, ‘2030’ 비전을 작성하고서도 재정은 후세대가 결정할 것이라고 미루어버렸다.
‘복지정치’의 위력
사회자가 묻는다. ‘예산을 어느 곳부터 배정하시겠습니까?’ 물론 이 질문에 성실히 답해야 한다. 최저생계비를 올리든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해소하든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보편 복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보편 복지는 저소득계층의 복지 질을 더욱 알차게 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어떠한 정책도 정치를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정책 논리’를 넘어 ‘복지정치’로 더 나가야 한다. 초등학교 5~6학년 모든 아이에게 적용되는 무상급식!, 여기서 대중적 복지 체험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복지정치’를 배운다. 그리고 “무상급식 처음에 대단치 않게 생각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좋네요”라는 동네 아주머니의 이야기에서 그 정치의 위력을 확인한다.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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