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회복지학계 학술대회에서 중년의 교수가 정치권의 보편·선별 복지 논쟁에 불만을 토로했다. 보편·선별 잣대가 전체 복지를 선악 이분법으로 단순화하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이는 내가 복지 강연에서 종종 받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상급식을 보편복지 방식으로 시행하자는 것에 찬성하지만, 보편복지로 설명하기 힘든 복지가 여럿 있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현재 70% 소득계층까지 적용되는 보육료 지원은 보편복지인가, 선별복지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초생활보장급여는 선별복지일 텐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복지인가?
복지의 세 가지 유형
요사이 보수 진영은 자신의 선별복지를 ‘맞춤형 복지’로 포장을 바꾸어 내놓는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복지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성전이라고 칭송한 나경원 후보도 “선별적·보편적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두고 논쟁할 게 아니라 이제는 생활복지를 해야 한다”며 보편·선별 구분 자체를 허물고자 한다.
사실 보편복지는 대학 강의실에서 적합한 말이다.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용어다. 그런데 무상급식이라는 아이들 점심 논란이 어느새 보편복지라는 담론을 일상생활 공간까지 퍼뜨려버렸다. 복지에 목마른 민심,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다. 이제 무상급식 논란을 일단락하는 시점에서 보편복지를 되짚어보자.
용어 정의는 명확하다. 보편복지는 차별 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복지이고, 선별복지는 특정 기준에 따라 일부에게만 제공되는 복지다. 이때 기준은 소득과 자산을 포함하는 경제적 능력이다. 학교 재정이 모든 아이의 급식 비용을 충당한다면 이는 보편복지이고,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만 급식비를 면제한다면 이는 선별복지다. 기초노령연금도 노인에게만 지급한다고 해서 선별복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인의 기준은 경제력이 아니라 연령이기 때문이다. 대신 경제력이 취약한 노인에게만 제공하면 선별복지이고,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면 보편복지다. 그래서 동일한 질문이 제기된다. 현재 70%의 노인에게 월 9만원씩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은 보편복지인가, 선별복지인가?
지금까지 인류가 발전시켜온 복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기초생활보장급여·자활지원 등 공공부조다. 애초 공공부조는 자본주의 초기 영국에서 교회나 지역사회가 빈민들을 위해 벌인 구빈사업에서 시작되었는데, 점차 그 역할이 정부로 넘어오며 국가의 복지사업이 되었다. 당연히 공공부조는 경제적 능력이 기준으로 작용하기에 선별복지의 지위를 지닌다.
둘째는 고용·의료·산재·연금 등 사회보험이다.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일하며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아프거나 다칠 수 있고, 언젠가는 노동시장에서 은퇴해야 한다. 이렇게 노동시장에서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 사회보험이다. 모두가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보편복지 방식으로 설계된다. 노동자라면 4대 사회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자영업자도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에 보험료를 내야 한다.
셋째는 보육·간병 등 사회서비스와 기초노령연금·아동수당 등 사회수당이다. 보통 사회서비스는 돌봄 형태로, 사회수당은 현금 형태로 제공되는데, 아동·노인이면 모두가 대상이라는 점에서 보편복지 성격을 지닌다. 사회보험과 비교해 주로 노동시장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고, 재정이 세금으로 조달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공공부조는 애초 선별복지로 설계된 것이고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보편복지를 지향한다. 따라서 보편·선별 논쟁의 대상은 공공부조가 아니라 사회보험,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이다. 보편복지여야 할 이것들이 선별복지로 시행될 때 논쟁이 발생한다.
복지를 보편·선별로 나누는 일
보편복지가 처음부터 모두에게 제공되는 경우는 드물다. 초기에는 재정 여력, 제도 인프라 등에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발전하는데, 사회보험은 하향식,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상향식 경로를 밟는다. 즉 사회보험은 보험료 부담 능력을 지닌 윗계층부터, 사회서비스는 정부 예산을 고려해 아래 계층부터 혜택이 주어진다.
국민건강보험의 경우 도입 첫해인 1977년에는 500인 이상 대기업 사업장이 대상이었다. 이후 점차 중소기업으로 확대되었고, 1989년 도시 지역까지 포괄하며 전 국민 의료보험으로 자리잡았다. 국민연금은 1988년 10인 이상 사업체에서 시작해 1999년 도시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2003년부터 5인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되고 있다. 반대로 사회서비스인 보육료 지원은 저소득계층부터 시작해 이제 70% 계층까지 대상이 늘어났고, 기초노령연금도 도입 첫해인 2008년에 노인의 60%, 지금은 70%까지 지급된다.
비록 단계적 경로를 밟지만 보편복지가 순조롭게 성장하면 얼마나 좋을까? 대한민국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국민연금은 꽤 괜찮은 노후 복지제도지만, 성인 인구 중 절반이 비경제활동인구이거나 보험료를 낼 여력이 없어 연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용보험의 경우에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가입률이 현재 36%에 불과하다. 사회보험들이 아래 계층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정체돼 있다. 제도 원리로만 보면 보편복지지만 현실에서는 취약 노동자를 배제해 오히려 계층 간 역진적 효과를 내는 ‘거꾸로 선 선별복지’인 셈이다.
사회서비스 영역도 아직 보편복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다.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 능력에 영향을 받는 사회보험과 달리,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국가 예산에 의존하는 까닭에 수혜 대상을 두고 정치적 논쟁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 지금까지 급식·보육·기초노령연금이 보편·선별 논쟁의 핵심 주제가 돼온 이유다. 보수 진영은 예산 제약을 이유로 사회서비스를 지금의 수준으로 묶어두거나 줄이려 하고, 진보 진영은 가능한 한 대상을 넓혀 보편복지로 완성하려 한다. 그래서 70%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보육료 지원, 기초노령연금은 보편복지론자에게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보편복지’이고, 선별복지론자에게는 ‘예산 지출을 왜곡하는 선별복지’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모든 복지를 보편·선별로 나누는 것이 적절한가? 그렇다. 보편과 선별의 지위를 명시하는 이유는 각 복지가 자신의 유형에 맞게 자리잡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기초생활보장급여는 선별복지로서 저소득계층의 최저생활을 보장해야 하고, 사회보험, 사회서비스·사회수당은 사회 구성원의 필수품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선택·맞춤’, 선별의 또 다른 이름
우선 선별복지의 대표 격인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구실이 중요하다. 근래 보편복지 담론이 강조되며 상대적으로 공공부조 복지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우려마저 든다. 튼튼한 공공부조는 보편복지 논의의 전제조건이다. 현재 기초생활보장급여를 정하는 기준인 최저생계비 금액이 너무 낮고, 현실성이 결여된 부양의무자제도 탓에 절대 빈곤선 아래에 있는 상당수 사람들이 급여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정부가 새로 구축한 사회복지통합관리망을 활용한 부양의무자 조사를 통해 무려 17만 명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를 급여 대상에서 탈락시켰다. 최저생계비 결정 기준, 부양의무자 설정 등 제도적 결함이 존재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예산 제약’에 있다. 공공부조 대상 범위가 이를 필요로 하는 수요가 아니라 사실상 정부가 편성하는 예산 수준에 맞추어 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보험은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줄여나가야 한다. 그런데 뾰족한 대책이 마련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근본 원인이 사회보험제도보다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있기 때문이다. 완전고용 시장을 전제로 설계된 사회보험이 현재와 같은 노동시장에서 보편복지로서 실효성을 지닐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점차 사회보험도 국가재정 몫을 늘려 조세 중심의 복지로 전환하는 것을 모색해야 하고, 단기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이 시급하다. 단, 직장과 지역을 합해 모든 국민을 포괄하는 국민건강보험의 경우에는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즉 무상의료가 핵심 과제다.
사회서비스·사회수당 영역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보편·선별 논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대체로 급식은 무상급식 운동의 성과로 보편복지로 도약하고 있는 반면, 보육·기초노령연금 등은 아직 미래가 불투명하다. 왜 굳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위 계층까지 복지를 제공해야 하는가? 무상급식에선 아이들의 자존감을 강조하고, 의무교육의 연장으로 의무급식을 내세웠다. 상대적으로 논리적 설득력이 충분했다. 소요 재정이 훨씬 큰 보육·기초노령연금에서는 한층 체계적인 복지 철학과 담론이 필요하다. 기본적 필수 서비스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는 시민적 권리라는 인식을 확산하고, 이런 사회적 연대를 토대로 상위 계층의 재정 책임을 요청해나가야 할 것이다.
지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보편·선별 논쟁의 1라운드는 보편복지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된 듯하다. 이제 내년 총선·대선을 향해 2라운드가 준비되고 있다. 선별복지 진영의 대표 선수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나설 예정이다. 논리도 세련돼가고 있다. 바로 ‘선택형·맞춤형’이다. 복지 수혜자가 수동적으로 차별당한다는 어감을 주는 ‘선별’에서 능동적으로 접근한다는 의미에서 ‘선택’, 그리고 정부가 예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맞춤’이다. 물론 그렇다고 선별복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수요자가 자신의 복지 적용 여부를 결정한다면 ‘선택’이지만, 공급자가 특정 기준에 따라 복지 대상을 정한다면 ‘선별’이 맞는 용어다. 또한 예산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복지예산 규모 자체가 작은 곳에서 ‘맞춤형’은 현재의 빈약함을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을
다가오는 2라운드인 내년 총선·대선에서도 사회서비스·사회수당 영역이 중심 전선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복지 논의 지형을 보편·선별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그리고 ‘선택형·맞춤형’으로 자신을 재포장한 선별복지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카드는 보편복지를 위한 실질적 재정 방안을 마련하는 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별복지 세력이 ‘한정된 예산’을 강조하는 만큼, 보편복지 세력은 ‘예산 확충’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을 만들어가야 한다.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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