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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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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무상의료…도와줘요! 의사 선생님

영국인의 자랑인 무상의료체제 NHS를 둘러보다, 지속 가능한 무상의료 도입하려면 의료계 협력 절실
등록 2011-07-29 15:53 수정 2020-05-03 04:26

친구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지금 딱 한 가지 복지만을 고를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느냐고. 난감한 질문이었지만, 난 ‘무상의료’라고 답했다. 언젠가는 시골에서 노후를 검소하게 보내려는 나에게도, 병원비는 걱정거리다. 누구든 질병에 자유로울 수 없고,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러할 텐데, 큰 병이라도 걸린다면 병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난 내가 활동할 수 있는 기간 내에 무상의료는 꼭 이뤄야겠다는 절박한 이해관계를 지녔다.
열흘 전 영국 국민의료체제(NHS)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사회주의 국가보다도 잘 만들어졌다는, 거의 모든 공공기관을 민영화한 마거릿 대처 총리도 손대지 못했던, 그만큼 영국민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도가 바로 NHS다. 국내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주관하는 탐방 프로그램 안내 전자우편을 받고 곧바로 신청서를 냈다. ‘내 노후의 의료제도’를 미리 접한다는 기대감에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는 일도 번거롭지 않았다.

‘긴 대기시간’ 불명예 벗은 NHS

무엇보다 반가운 건 NHS에 늘 제기되던 ‘부족한 재정’과 ‘대기시간’ 문제가 상당히 해소됐다는 점이다. 영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작은 비용으로 무상의료를 실현하는 나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기시간이 숙제였다.
1979년부터 1997년에 이르는 18년의 보수당 집권을 종식시키고 등장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가 직면한 것은 입원 대기환자 수가 무려 130만 명, 입원 치료를 위한 대기시간이 평균 15주에 이르는 NHS 현실이었다. 지난 시기 ‘공공지출 관리’라는 명분하에 병원시설과 인력에 대한 빈약한 투자가 낳은 결과였다. 1998년 영국의 의료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6.7%로 주변 국가인 독일(10.2%), 프랑스(10.1%), 스웨덴(8.1%)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영국은 무상의료에서 상징적 국가였으나 의료비 지출에선 참 가난했다.
마침내 노동당 정부는 NHS 내부 개혁과 함께 의료비 재정지출을 늘려나갔다. 그 결과 10년이 지난 2008년, 영국의 의료비 지출은 GDP의 8.8%, 2009년에는 GDP 감소라는 외적 요인까지 겹쳐 9.8%로 상승했다. 비록 GDP의 11%대를 지출하는 독일과 프랑스 등에 비해 다소 낮지만, 같은 기간 영국에서 전체 인구수나 고령화율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의료서비스 확대로 해석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NHS 종사 인원이 1996년 106만 명에서 2009년 143만 명으로 늘어났고, 의사 수는 8만7천 명에서 14만1천 명으로 무려 62% 증가했다. 입원 대기환자 수는 2010년 60만명대로 낮아졌고, 평균 15주에 달하던 입원 대기시간도 4.3주로 낮아졌다(물론 응급환자는 바로 진료받을 수 있다).
종종 보수 진영에서 무상의료가 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해 의료비 지출이 급증하고 의료서비스도 낙후할 것이라고 비판하는데, 이제 나는 자신있게 지금의 영국 NHS를 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재정의 힘이 컸다. 우리나라도 건강보험 재정을 늘리자. 현재 가입자가 민간의료보험에 내는 돈의 일부만 국민건강보험료로 전환하면 우리도 무상의료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재원 마련 뒤 정책적으로만 보면 수가제도를 바꾸고 주치의제도를 의무화하는 법령이 만들어지면 되겠지만, 정치적 면에서 의료계의 협력 없이는 무상의료는 성사되기 힘들다. 2009년 10월6일 오전 ‘의료민영화 저지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계동(율곡로) 보건복지부 앞에서 출범식을 하며 의료민영화 저지 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재원 마련 뒤 정책적으로만 보면 수가제도를 바꾸고 주치의제도를 의무화하는 법령이 만들어지면 되겠지만, 정치적 면에서 의료계의 협력 없이는 무상의료는 성사되기 힘들다. 2009년 10월6일 오전 ‘의료민영화 저지 및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계동(율곡로) 보건복지부 앞에서 출범식을 하며 의료민영화 저지 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무상의료를 위해선 재정 확대가 필수적이지만, ‘지속 가능한’ 무상의료가 되려면 의료비 관리도 중요한 과제다. 영국은 어떻게 상대적으로 작은 의료비 지출로 무상의료를 구현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던 나는, 우선 한국 의사와 영국 의사의 고용 형태가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영국 의사들이 NHS에 고용된 공무원으로 이해하는데, 1차 의료를 담당하는 개원의(GP) 대부분은 지역보건청과 계약을 통해 진료비를 받는 자영업자(Self-employed)이고, 2·3차 병원 의사들은 우리나라 병원의 봉직의처럼 월급을 받는 피고용인이다. 결국 우리나라와 동일하게 개원의는 자기 의원에서 진료 수입을 올리는 개인사업자이고, 상위 병원 의사들은 월급을 받는 피고용자다(다만, 영국의 대부분 병원은 국가가 소유한 공공병원이라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의료비 낭비 부추기는 ‘행위별 수가제’

그런데 의사 수입, 즉 진료비를 계산하는 방식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진찰·검사·주사 등 각 의료행위마다 가격이 매겨지는 ‘행위별 수가제’에 의해 진료비 총액이 계산된다. 행위별 수가제에서는 서비스를 제공받은 뒤 진료비 총액이 결정되므로 되도록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경제적 유인이 의료공급자에게 발생하게 된다. 나는 가끔 가족이나 친척이 병원에서 고가 검사를 받을 때면 굳이 이렇게까지 검사가 필요한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은데, 이 역시 행위별 수가제에서 비롯되는 불신이다.

이에 비해 영국은 여러 수가제가 혼합돼 있지만, 기본적으로 진료비가 서비스 제공 이전에 미리 결정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개원의는 자신에게 등록된 환자 수에 따라 진료비를 받는다(환자 특성에 따라 가중치 적용). 여기에 특정 진료에 대한 보상과 서비스 평가에 따른 인센티브 등을 합산해 총수입이 결정된다. 병원도 지역보건청에서 일정한 진료비를 미리 배정받는 총액예산제와 환자의 질병 중증도를 고려한 비용 등을 종합해 수입을 얻는다. 개원의든 병원의든 모두 세분화된 진료 행위마다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등록 환자 수나 환자 질환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는 방식을 따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행위별 수가제 대신 환자 수를 고려한 총액예산제, 질환별로 진료비가 정해지는 포괄수가제를 도입해 과잉 진료 동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얼마 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유럽 의료체제를 방문해 만든 보고서를 통해 총액예산제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지난 6월 기획재정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동 개최한 복지 분야 중·장기 재정 운용 방향 토론회에서도 진료비 통제를 위해 총액예산제·포괄수가제 도입이 논의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포괄수가제는 일부 몇몇 질환에 한정돼 실시된다. 백내장수술, 맹장수술, 제왕절개분만, 편도선수술, 항문수술 등 7개 질환에 대해서는 진료량과 무관하게 진료비를 책정하는 질환별 ‘포괄수가제’가 적용되고 있다. 특히 올해 7월부터는 포괄수가제 적용 질환 범위를 대폭 확대해 건강보험공단이 직접 운영하는 일산병원과 지역 3개 의료원 등 4개 병원에서 553개 질환(전체 질환의 96%)에 대한 포괄수가제가 시범 적용되고, 내년에는 40개 지역거점 공공병원으로 적용을 확대할 예정이다. 이제 의료비 지출 관리를 위한 수가제 개혁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국민이 주치의 가진 영국

한 가지 더, NHS에선 주치의제도가 감동적이다. 우리나라에선 대통령이나 재벌 회장만이 주치의를 두고 있지만, 영국에선 모든 국민이 주치의를 가진다. 즉 개원의 중 한 사람을 선택해 주치의 관계를 맺고 건강 예방과 상담, 질병 치료를 받는다. 환자가 종합병원 진료를 받아야 할 때도 반드시 주치의가 진료의뢰서를 작성하고 환자와 협의해 전문진료를 받을 병원을 선택한다. 영국 NHS가 무상의료를 실현하면서도 의료비 지출을 절감할 수 있던 배경에는 적절한 진료비 지급제도를 통한 과잉진료 요인 제거와 주치의 제도를 통한 환자의 지속적인 질병 관리가 큰 기여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든 국민이 주치의를 가질 수는 없을까? 가능하다. 영국도 민간 개원의 체제에서 주치의제도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환자와 개원의가 의무적으로 주치의 관계를 맺도록 하면 된다. 근래 개원의 간 경쟁에 따른 부담이 커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주치의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의사들이 생기고 있고, 의료생협이 있는 지역에서는 이미 주치의제도가 모범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나치게 전문의 중심으로 된 우리나라 개원의 구조의 난점이 존재하지만, 가정의와 내과 등을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주치의제도를 확대하고 궁극적으로 의료인 양성 구조를 보완해나가야 한다.

정리하면, 무상의료 재정 마련, 수가제도 전환, 그리고 주치의 도입! 이 세 가지가, 내가 영국 NHS를 탐방하면서 노트에 적어 놓은, 대한민국 무상의료를 위한 과제다. 과연 내가 꾸는 이 꿈이 이뤄질 수 있을까?

우선 무상의료 재원 마련이 중요하다. 재원이 확보돼야 보장성이 높아지고, 기존 비급여를 모두 급여로 전환해 총액예산제나 포괄수가제가 효과를 발휘하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무상의료 재정 마련에선 기대해도 좋을 만큼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근래 복지국가 논의에 따라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비롯해 다수 세력들이 재정 확충 방안을 세밀하게 준비하고,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겠다는 시민운동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과제는 만만치 않다. 정책적으로만 보면 수가제도를 바꾸고 주치의제도를 의무화하는 법령이 만들어지면 되겠지만, 정치적 면에서 의료계의 협력 없이는 성사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의료계는 수가제도 개편이나 주치의제도로 인해 자신의 수입이 줄어들거나 진료 재량권이 감소할 것을 우려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현행 의사 수입이 줄어들지 않는 선에서 총액예산제나 포괄수가제를 설계하면 된다. 이후에는 지금과 같이 진료행위 하나하나에서 수입을 올리기보다는, 평판을 좋게 받아 방문환자 수를 늘려 수입을 확보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영국 개원의와 병원 의사들이 진료하는 방식이다. 특히 주치의제도는 환자에게 ‘꿈의 실현’이지만 의사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주치의가 되면 환자와 맺는 ‘상품적 관계’가 ‘인격적 관계’로 변하고, 의사들은 자신이 일하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시민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웃을 돕는 인류애적 행위로

히포크라테스 앞에서 서약했듯이, 의료는 돈에 앞서 함께 사는 이웃을 돕는 인류애적 행위다. 시민들 스스로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서라도 무상의료를 이루겠다고 나서고 있지 않은가! 의료생협을 운영하는 어느 의사는 무상의료를 두고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들이 둥지를 튼 이후 이제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라고 페이스북에 찬가를 적기도 했다. 의료계의 협력이 절실하다. 의사 선생님, 대한민국 무상의료를 도와주세요.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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