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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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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사라진 복지 분발해야 할 ‘진보’

보편·선별 논쟁 치르며 막 오른 복지 대선 레이스
의료·보육·요양 등 민간 복지 서비스 공공화 제기해야
등록 2011-06-03 14:07 수정 2020-05-03 04:26

내년 대선을 앞두고 복지국가를 향한 주도권 경쟁이 한창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아버지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셨지만,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며 복지국가를 자신의 역사적 과제로 선언했다. 민주당은 이미 지난해 가을 ‘보편적 복지국가’를 강령에 명시하는 개정 작업을 완료했고, 복지국가 원조 격인 진보 정당들도 ‘사회연대 복지국가’(진보신당), ‘노동 중심 평화복지’(민주노동당)를 내세운다.

복지는 말만으론 이뤄지지 않아

얼마 전에는 일부 시민사회 세력이 복지국가를 가치로 야권 단일정당을 건설하자는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처럼 복지국가를 깃발로 제2민주화운동을 벌이자는 제안이다. 지난해 말 진보 대통합을 주창하며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기구의 이름도 ‘복지국가와 진보 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다. 최근 참여연대는 복지국가 전략을 마련하고 노동·교육·여성 등 사회단체들에 ‘복지국가 사회연대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 복지국가가 2012년 대선의 핵심 의제가 될 전망이다. 지난 3월31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구 달성군을 방문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 1월31일 서울 영등포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오른쪽 사진 왼쪽 둘째)가 보편적 복지 재원 마련 방안 등에 대해 밝히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 한겨레21 김경호

» 복지국가가 2012년 대선의 핵심 의제가 될 전망이다. 지난 3월31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구 달성군을 방문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 왼쪽). 지난 1월31일 서울 영등포당사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오른쪽 사진 왼쪽 둘째)가 보편적 복지 재원 마련 방안 등에 대해 밝히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 한겨레21 김경호

이를 어찌 보아야 할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이 많은 사람들이 복지국가를 부르니 이제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로 진입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라는 ‘이름’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조차 취임사에서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국가 건설’을 선언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복지국가는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론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 복지국가 담론이 싹을 틔우려면 김상곤 교육감과 무상급식 같은 ‘실물’이 필요하다.

2011년 현재, 곳곳에서 선보이는 복지국가 담론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검증돼 도출된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을 직시하자. 지금 확인된 것은 민심이 복지국가를 갈망한다는 것일 뿐이다.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세력들이 실제 복지국가를 구현할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민주당, 진보 정당 모두 무상의료를 주장한다. 이들이 동일한 노선과 실행 프로그램을 가졌을까? 무상의료는 ‘공짜’ 의료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늘려 환자가 병원 문을 나설 때 내야 하는 본인부담금을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것, 이를 위해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대폭 늘리는 것, 이것이 무상의료다.

이는 무상의료라는 건물 한 면의 모습이다.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으로 인해 민간의료보험이 존재한다.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은 국민의 본인부담금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무상의료는 민간의료보험이 해소된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해 3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상·하원에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의보개혁 법안에 서명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적 운명을 걸고 추진했던 법안이다. 하지만 법안 서명을 바라보는 오바마 대통령 지지자들의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애초 의보개혁 법안의 핵심 내용인 공공의료보험(Public Option) 도입이 삭제됐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는 민간의료보험만이 존재한다. 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보험료가 저렴할 공공의료보험의 도입은 민간의료보험회사엔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수세력과 민간의료보험회사들이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공공의료보험 조항은 빠져야 했다.

무상의료로 가는 험난한 길

최근 보건의료학계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 국민이 민간의료보험에 납부한 보험료 총액이 무려 33조원이다. 국민이 민간의료보험에 가구당 평균 3.5개씩 가입해 있고, 월평균 보험료가 총 20만원에 달한다. 같은 해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수입 규모는 약 30조원인데, 이 중 기업 부담, 정부의 국고 지원 등을 제외하면 가입자가 납부한 자가 부담 보험료는 15조원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우리는 국민건강보험에 내는 보험료의 2배를 민간의료보험에 내며 살고 있다.

미국 오바마 정부의 경험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무상의료는 기득세력의 저항과 맞서야 한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우리나라 보험회사들은 상당수가 재벌 계열사다. 무상의료를 실행한다는 것은 민간의료보험회사, 나아가 재벌의 장벽을 넘어서야 하기에 무상의료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반드시 민간의료보험 해소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지난해 7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라는 보건의료단체가 발족했다. 국민건강보험료를 월평균 1만1천원씩 더 내면 기업과 정부 몫이 함께 늘어나므로, 이를 재원으로 무상의료를 이루자는 운동을 펴고 있다. 시민회의는 ‘모든 병원비를 민간의료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민간의료보험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진보 정당 역시 민간의료보험 체제 해소를 보건의료 부문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데, 근래 민간의료보험의 폭리 실태와 재정 불투명성을 꾸준히 제기하는 진보신당 보건의료팀의 활동이 돋보인다.

» 지난해 10월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김황식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동안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4대강 예산을 복지 예산으로 쓰자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 지난해 10월25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김황식 국무총리가 대독하는 동안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4대강 예산을 복지 예산으로 쓰자는 피케팅을 하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민주당의 무상의료 방안은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의 합리적 역할 분담’을 강조한다. 당분간 민간의료보험과 동거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 인식이 엿보이지만, 무상의료라는 대사를 벌이려는 결기는 약해 보인다. 우리나라에선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애초 공약을 미루는 일이 많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지 않은 이유다. 무상의료가 우리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는 꽃’이 되려면 병원비 불안을 이용해 오히려 서민가계의 부담을 가중하는 민간의료보험 해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활동을 벌여야 한다.

무상의료 건물을 짓는 데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무상의료는 모든 진료비를 국민건강보험이 지급하기에 지금까지 의사들이 임의대로 가격을 매겼던 비급여 진료를 이제부터는 국민건강보험이 해당 진료비를 심사하고 지급한다는 것을 뜻한다. 건강보험 재정 측면에서는 모든 진료 내역을 엄격히 심사해 불필요한 진료비 낭비를 줄이려 할 것이고, 이는 의사들에겐 불편한 일이 될 것이다. 무상의료와 의료 공급자 집단이 순조로운 협력 관계를 맺기 어려워서 의료 공급자의 반발이 예상된다. 대부분 민간시설에서 의료가 행해지는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무상의료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복지, 한국사회 구조혁신의 핵심 논점

무상보육도 그렇다. 민주당과 진보 정당이 완전 무상보육을 주장하고, 최근에는 정부조차 5살 어린이 무상보육을 선언했다.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보육시설은 민간에 의해 운영된다. 규모가 영세하고, 상업적 운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보육교사의 처우가 열악하다. 많은 부모들이 국공립 보육시설을 선호하듯이, 공공형으로 제공할지 시장형에 의존할지에 따라 보육복지의 의미가 달라진다. 제5사회보험으로 도입된 장기요양제도는 심각한 지경에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민간요양기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장기요양 재정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기 어렵다. 결국 보육이든 요양이든 복지국가 세력이라면 서비스 공급 체계의 공공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일자리도 논점이다. 복지가 노동시장의 한계에 대응하는 것이기에 안정적 일자리는 복지국가의 지속 가능성에 중요한 조건이다. 모두가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말하지만, 불안정 고용을 정당화하는 현행 비정규 관련 법안을 어떻게 바꿀지, 중소기업의 지급 능력을 키우려면 대기업의 역할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실행할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복지국가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선수들’이 복지국가 로고를 담은 티셔츠를 입고 마라톤 출발선을 막 넘었다. 보편·선별 복지 논쟁 예선전을 통과한 선수들이다. 지금은 모두 의기양양하지만, 민간의료보험 해소와 진료비 심사 강화, 보육과 요양 서비스 공급체계 혁신, 괜찮은 일자리 만들기, 대기업 규제 등 중간 코스를 지날 때마다 자신의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초반 경주 양상이 다소 의아하다. 지난 정권까지 복지국가파라고 불리기 어려웠던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반면, 복지국가 원조 격인 진보 정당은 의례적 활동에 머물고 있다. 초반 페이스 조절도 아니다. 보수세력과 민주당까지 주창하는 복지국가 담론으로는 진보 정당의 차별성을 드러낼 수 없다고, 복지국가라는 재분배 중심 체제로는 일자리, 경제구조 혁신 같은 근본적인 과제를 담을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과거 행적에서 미덥지 않은 세력이라고 여기더라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복지국가까지 타박하는 건 곤란하다. 다른 선수들이 열심히 복지국가를 향해 뛰고 있는데 복지국가의 한계를 강조하며 제자리뛰기만 하는 격이다. 이러다간 진보 정당의 대표적 브랜드마저 놓쳐버릴지 모르겠다. 다른 미래 비전을 찾고 싶겠지만, 지금은 복지국가가 민심의 열망과 소통할 수 있고 한국 사회 구조를 혁신하는 논점을 끌어올 수 있는 핵심 담론임을 중시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한계를 애써 찾는 자존심보다 복지국가가 만들어낼 역동성에 주목하자. 복지국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국방비와 토목비 등 재정지출을 개혁하고, 의료·보육·요양 등 민간 복지공급 체계를 공공화하고, 노동시장과 기업 관계를 혁신하는 일까지 모두 복지국가가 다룰 수 있는 과제다.

진보 정당 특유의 강점 살려야

이제부터는 진보 정당이 나서서 초반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대중과 만나는 진보 정당 특유의 강점을 살려야 한다. 여의도 정치 공간을 넘어 전국 곳곳에서 복지국가 촛불운동을 전개해도 좋다. 국민의 복지국가 열망이 ‘거품’이 아니라 ‘열매’로 맺어지도록 복지국가 ‘원조’의 분발을 기대한다.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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