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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다

등록 2011-05-27 15:31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일 게다. 물론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이, 돈이다. 돈이면 거의 모든 미인들을 벗기고, 거의 모든 신(神)들을 호출하며, 부모도 죽이고, 대통령도 만들며, 미소와 영혼도 판다. 전통적으로 남자들은 적든 많든 권력(지배력)을 추구하며, 이로써 자신의 삶을 증명하려고 애써왔다. 대체로 권력의 매력은 맹목적이어서 커지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나 상위의 규준이 없다시피 했다. 권력을 홀로 장악하기 위해 형제를 죽이는 일은 다반사였고, 제가 낳은 자식을 죽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약자의 삶을 견뎌온 여자들은 주로 개인의 매력에 의지해서 남자들의 권력망 속을 약빠르게 운신해왔다.

영혼과 돈이 직통하는 세계

체제적 권력과 개인적 매력으로 나누어 자신을 증명하던 관례는 특히 근대사회의 직업적 분화와 전일적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종횡으로 나뉘고 서로 얽히게 되었다. 엉뚱하게도 권력과 매력의 일치가 자본제적 삶의 여러 형식 속에서 기형아처럼 탄생하기도 했다. 문화권력이니 상징적 지배니 매체효과니 과시적 절제(conspicuous abstention)니 하는 현상들은 지난 시대의 이데올로기적 범주들이 설정한 도식으론 이 세속의 흐름과 그 물매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 징표일 게다. 물론 거기에도 돈이 들어가 있다. 돈은 돌이킬 수 없이, 전방위적으로, 살과 핏속까지 침투해 모방욕망과 인정투쟁을 지배한다.

세속의 풍경은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고 번란하다. 그러나 그 풍경은 모짝 상품-풍경으로 되먹히고 그 마지막에는 자동 환전(換錢)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신처럼 자리한다. 이처럼 영혼(안)과 돈(밖)이 직통하는 체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절차는 왜소해진다. 게다가, 증명과 인정에 욕심이 얹히는 순간 왜곡되기 일쑤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내남없이 돈으로써, 물질적인 성취로써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친구와 형제, 그리고 부모를 죽이는 일이 이제는 권력에서 자본의 장(場)으로 옮겨온 듯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돈 때문에 사람이 상하고 죽임을 당한다.

불가능한 존재증명 시도

얼마 전 경북 문경의 외진 곳, 어느 채석장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자살의 형식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괴이한 사건으로 잠시나마 매스컴의 주목이 대단했다. 죽기 전의 언행을 살피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어느 외진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한 사람과 동일시하려는 혐의가 집힌다. 삶을, 삶의 형식이 유지하는 일관성을 통해서 신이 되지 못한 자가 죽음의 형식을 통해 그 환상을 갈무리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짝 돈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이 세속에서) 대체 무엇을 증명하려고 한 것일까? 삶이 이루지 못한 것을 죽음(자살)으로써 증명하려고 했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이며, 그것은 한편 당연한 결말이다. 마치 평생을 완악한 이기심으로 재산을 불린 구두쇠가 임종을 앞두곤 전 재산을 모모한 기관에 희사해 세간의 이목을 모은 것으로써 그의 삶을 되돌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는 삶의 힘과 그 일관성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던 것이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으로써 삶을 구원하려고 하진 말아야 했다. 그가 증명하려던 것은 아아, 불가능한 것! 다만, 그 실패를 통해, 이 그로테스크한 자살이 남긴 사회적 후유증의 어느 한 갈래를 통해, 돈이 지상의 모든 것을 증명하는 세속 속에서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열정과 동경으로써 사람됨의 형식을 만들어간다는 사실만큼은 드러낸 것이 아닐까.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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