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조국(祖國)과 같은 것은 남자(할-아비)들이 만든 것이다. ‘법적인 것’은 워낙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에서 생겨났다고 하듯이 말이다. 의 가부장 남편 헬머가 선포하듯이 남자들은 ‘명예’라는 것을 사랑 위에 둘 줄 아는 법을 비교적 일찍 배운 족속이다. (남자들이 왜 바람을 피우는지, 실없이 묻고들 하는데, 남자들은 생물학적 일회성의 적나라함에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제도권력적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선택적·특권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은 ‘자연’히 약자로서 퇴각한 자리에 남은 비(非)사회적 잔여, 즉 생물학적 자연성에 내몰리는데, 당연히 조국 같은 것에 쏟을 여력이 없(었)다.
정치권력에 직접 개입하는 여성들
지난날의 여성(주부)은 남편의 등 뒤에서 남편이 넘기는 신문지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의 소식을 짐작한다고 했지만, 전통적으로 여성에게는 세상이든 조국이든 그것은 우선 어느 남자들을 매개로 접속되었고, 물론 그 매개의 최종심급은 사랑(그것이, 무엇이든!)이었다. 그러므로, 지난날의 여성이 조국이나 명예, 혹은 심지어 정치권력을 추구하더라도 대체로 광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힙겹게 사랑을 억압·승화한 끝에 가능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지 사랑의 낭만주의나 관념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여성만의 축소된 현실 속에서 어렵사리 운신해야 했던 여건을 반영하는 것으로 역설적이긴 하지만 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처럼 한 여성으로서 애정의 문제가 별반 주제화되지 않은 채로 국가-체계와 명예의 차원에 전면적으로 복무하고 정치권력에 올인하는 사례는 비교적 근년의 것이다. 이것은 가령 외래의 식민권력에 저항했던 어린 유관순의 경우와도 별개며 나혜석이 당대의 남성권력과 투쟁했던 경우와도 다르다. 해나 아렌트에서부터 김상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동료 인간들이지 국가기구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올바른 지적이지만, 차츰 동료 인간들이 아니라 국가기구를 사랑(?)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추세에 소수의 여성이 매우 당당하고 현명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별개로, 제도 인문학이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에 인문학의 제반 영역을 여성이 새롭게 채우고 있는 모습도 도드라지는데, 이것도 필경은 넓은 의미의 ‘사랑’의 문제로 풀어낼 수 있는 구조적 현상인 것!)
사랑을 통한 권력, 신정아 사건의 보수성
조지 오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구라파의 문인들이 이른바 ‘전이(轉移)된 민족주의’에 휩쓸리는 유행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식이다. “전이의 대상은 라프카디오 헌에겐 일본이었고, 칼라일과 그의 많은 동시대인들에겐 독일이었으며, 우리 시대엔 대개 러시아다.” 여자에게는 워낙 조국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의 경우에 국가나 이와 유사한 체계를 향한 욕망은 그 자체로 전이된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앞서 지적한 대로, 전통적으로 이 전이의 매개는 ‘사랑하는 남자’들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국가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랑(여자)에 좀더 편하고 유리하게 접속하려는 태도를 보여왔다면, 여자들은 사랑(남자)를 통해서야 비로소 ‘전이된 욕망의 대상’으로서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한 대상과 접속하게 되는 셈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거나, 여자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식의 섣부른 진단에 한 가닥 의미 있는 취의(取義)가 있다면, 이 접속의 절차와 순서에 시대의 증상처럼 중요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정아 사건의 보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는 이 증상에 결코 깊이 동참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민 철학자·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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