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지진에 대한 조용기 목사의 해석이다. 이게 그저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그동안 내놓은 일련의 망언 시리즈가 증명한다. 김홍도 목사에 따르면 “서남아시아 지진과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럼 기독교 국가 미국에서 재해가 일어나면? “카트리나는 동성연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의 위험한 해석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으로 읽는 신학적 기호학은 충분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연히 발견한 유튜브의 영상 속에서 조용기 목사는 열심히 종말의 징조를 읽고 계셨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은 우리들도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려올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한 세대 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세대는 1998년도면 한 세대가 되는 것이니, 한 2000년쯤이면 한 세대가 다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이 84년도이므로 역시 16년 이후가 되면 이 세상 6천 년 역사가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영상 속에서 조 목사는 일각에서 자신을 “시한부 종말론자라 정죄한다”고 억울해하신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가르쳤을 뿐인데, 왜 그게 죄가 되느냐는 항변이다. 시한부 종말론자라면, 몇 월 몇 날 몇 시에 종말이 온다고 해야 할 텐데, 자기는 일시를 특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의 시한을 ‘년’ 단위로 정하는 건 괜찮다는 얘길까? 아무튼 주님이 주신 시한을 11년을 넘기도록 목사님은 아직 휴거를 못하셨다. 뒤늦게나마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자기부상 기술로 공중부양이라도 시켜드려야 하나?
목사님이 ‘주님의 말씀’이라 일컬은 것은 아마 을 가리킬 것이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 텍스트는 사도 요한이 밧모(파트모스)라는 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교부들의 견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견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신을 ‘요한’이라 칭한 저자는 예수가 편애했던 사도 요한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에 살다가 서기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소아시아로 이주했다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파트모스섬으로 유배된 사람으로 여겨진다.
은 종종 이단의 온상이 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 내용이 위험하다고 여겨져 한때 정경으로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루터 역시 한때 이 텍스트를 의심스러운 문서로 분류했다. 계시록은 흔히 ‘장차 될 일’의 예언으로 여겨지나, 실은 그것도 여러 해석 중 하나일 뿐이다. 계시록을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의 비유적 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저 형이상학 수준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텍스트라 보는 해석도 있다.
흔히 ‘종말론’이라고 하면 세상이 멸망하는 시나리오라 알고 있으나, 실은 그 안에는 악으로 가득 찬 한 시대가 끝나고 정의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더불어 승천하신 예수가 보좌에 앉아 천사들과 함께 내려오고, 천사들의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중 악한 자들은 영벌에 떨어지고, 오직 선한 자들만이 남아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시나리오다. 이 땅에 권세를 가진 악한 자들을 세상에서 쓸어버리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소망이 아닌가.
사실 종말론은 중세 초기의 기독교 신앙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을 지배한 것은 ‘대심판’의 관념, 세상 최후의 날에 ‘전 인류’가 예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중세 후기로 갈수록 영육이원론의 영향으로 ‘소심판’의 관념이 등장한다. 이제 개개인은 육체에서 영혼이 떨어지는 순간 혼자서 심판을 받는다. 구원받은 개인은 더 이상 육체(‘신령한 몸’)를 가지고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게 아니다. 그저 육체 없는 영혼이 되어 저 하늘에서 영생을 누릴 뿐이다. 영생의 개념이 소박한 것에서 철학적인 것으로 변한 셈이다.
물론 교회가 종말론을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다. 그저 머나먼 훗날의 일로 영원히 미루어놓았을 뿐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것은 종말론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시한부’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기독교 신앙을 중세 초기로 되돌린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적이다. 한동안 형해화한 이 중세 초기의 신앙이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하지만 이 재판 종말론은 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라 신도들의 소박한 믿음에 가까웠다. 당시 요란하게 종말론을 설파한 것은 교회 내의 성직자가 아니라, 교회 밖의 탁발승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종말을 외치는 이들은 교회 밖의 아웃사이더, 이른바 ‘이단’들이다. 어느 사회에나 좌절한 이들은 있기 마련. 종말론은 이들의 절망을 먹고 산다. 좌절한 이들은 자신의 몰락을 세계의 종말로 바꾸어놓는 데서 심리적 위안을 찾는다. 종말이 안 왔다고 신앙이 사라지겠는가? 신도들은 이번에 종말이 오지 않은 이유를 발견한 뒤, 또 다른 날짜를 정할 것이다. 문제는 아예 종말을 연출하는 경우다. “종말아 오너라. 네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네게로 가겠노라.” 이 경우 집단 자살극이 벌어지거나, 사린가스 테러가 일어나게 된다.
종말론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종말론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시대의 종말’, 즉 사악한 시대의 끝에 정의로운 시대가 오리라는 혁명적 메시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는 마르크스주의를 “트리어 지방(마르크스의 고향)에서 발생한 묵시록의 일파”라 불렀다. 이 말을 듣고 발끈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에 관해 쓴 글을 권하겠다. 거기서 엥겔스는 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초기 기독교 운동과 당시에 발흥하던 사회주의 운동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종말의 정서는 예술에도 존재한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문화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문화적 테러리스트’가 되어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제스처로 부르주아 문화의 종말을 연출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다양한 현대예술의 스펙트럼은 이 종말론적 감성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에 등장한 다른 모든 종말론처럼 이 예술적 버전의 종말론 운동도 실패로 끝났다. 부르주아 문화의 종언을 선언했던 그들의 요란한 도발도 오늘날엔 부르주아 문화 속에서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아방가르드와 닮은 철학적 종말론철학적 버전의 종말론도 있다. 사회주의가 몰락했다고 정치적 종말론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좌파 철학자들의 문헌 속에서 종말론의 경향은 더욱더 강해진 느낌이다. 과거에는 종말 이후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그런 희망 없이 그저 종말 자체에 대한 취향만이 두드러진다. 과거의 종말론이 현실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이었다면, 최근의 종말론은 머릿속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철학적 기획에 가깝다. ‘종말 자체가 정의’라는 이들의 관념은 ‘파괴 자체가 생산’이라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닮았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hr><font color="#991900"><font size="5">‘현대판 예언자’가 된 과학자들?</font></font><font color="#1153A4">지구의 미래에 대한 현대과학의 종말론적 전망과 우울한 통계는 ‘파국 예언’이 아닌 ‘각성제</font>“2012년에 정말 지구는 멸망하나요?” 2009년 무렵 내가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그해 말 개봉한 영화 가 큰 인기를 끌면서 ‘영화 속 설정이 과학적으로 그럴듯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고대 마야인의 달력이 2012년을 끝으로 멈춰 있다는 데 착안한 ‘마야문명 종말론’이 영화 속 설정이었다. 화산 폭발과 대규모 해일이 지구를 삼키는 처참한 광경은 꽤나 그럴듯하게 보였다. 나는 ‘2012년 지구의 운명’에 관해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과학적인 예측 결과를 늘어놓는 ‘현대판 예언자’ 노릇053을 한동안 해야 했다.
요즘 에너지나 환경 분야 학회에 가면, 학자들의 발표에서 온갖 종말론적 예언을 쉽게 만난다. 그들의 첫 슬라이드엔 빙산이 녹는 사진과 함께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구 대기온도가 급상승하는 그래프가 놓여 있고, 석유 매장량 곡선과 화석연료 소비량 곡선이 무시무시하게 교차하는 그래프가 그려져 있다. 한없이 어둡기만 한 지구의 운명이 서늘하게 예측된 첫 슬라이드와는 달리, 그들의 마지막 슬라이드엔 지구 종말을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자신들뿐이라며 어김없이 ‘○○○ 기술에 투자를 아껴선 안 된다’는 호소가 담겨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 현대문명의 민낯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고도 10년이나 지난 오늘날, 나를 포함해 전세계 과학자들은 중세시대 종교적 예언자들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들은 석유자원 고갈,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치명적 바이러스 창궐, 자연재해 등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으며, 30~40년 뒤에 지구는 도저히 생명이 살 수 없는 행성의 몰골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겁을 준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사회에서 과학자들은 때론 불확실한 미래 예언을 강요받고 예언자를 자임하기도 한다. 일례로 ‘저탄소 녹색성장’의 구호는 자칭 에너지 전문가들을 몇 달 만에 대량 양산하는 기적을 이루기도 했다. 할렐루야!
요즘 한창 화두가 되고 있는 ‘지속 가능한 발전’(Sustainability)은 사실 지금까지의 과학기술과 문명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종말론적 기술’이었음을 고백한 내밀한 자기반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이로니컬하게도,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단어는 과학 종말론이 범람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민낯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자기고백일지 모른다.
과학자들이 시녀가 된 ‘현대판 과학 종말론’이 종교적 종말론과 닮은 대목은 ‘종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신을 멀리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면 종말이 도래한다는 종교적 종말론처럼, 과학 종말론도 신의 위치를 넘본 ‘합리적 이성의 오만함’을 꾸짖는 식이다. 핵물질의 무분별한 사용, 불로장생에 대한 환상, 유전자 조작 및 복제를 통한 생명조작, 환경파괴, 통제 불가능한 나노머신 개발 등 금단의 영역까지 과학의 손을 뻗은 현대문명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2000년 ‘Y2K 대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크게 확산될 무렵 신문에 실렸던 칼럼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든 정보를 디지털에 저장했기에 그것을 한순간 잃어버리게 된 현대문명의 천박함을 꾸짖고, 극단적인 편리성의 추구가 ‘사상누각의 디지털 바벨탑’을 쌓았다며 호된 아날로그 가르침을 선사하던 어느 인문학자의 글 말이다(아마도 그는 그 글을 컴퓨터로 썼을 텐데!). 과학자들이 일조한 현대문명에는 천박한 대목이 적지 않지만, 나는 해프닝으로 끝난 ‘Y2K 사건’ 이후 그의 변명을 들어보고 싶었다.
인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설령 종말의 시나리오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나 이상기후 현상 때문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과소비, 육식문화, 소비주의, 안일하고 편한 삶에 대한 극단적 추구 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현대 종말론은 과학적 외투만 입었을 뿐 종교적 종말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과학자들을 ‘종말로 치닫는 현대문명의 기관사’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인류의 보편적 원리’라는 일종의 공리가 있는데, ‘인류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위기에 직면하더라도 인류를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인류는 반드시 다음 세대에도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한 얘기로 들리겠지만 예를 들어보자. 지구에 가장 해를 끼친 생명체가 어떤 종인지 과학적 분석을 해보니 ‘인간’이라는 답이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원리’가 전하려는 메시지다(실제로 인간을 ‘지구의 치명적 바이러스’라고 믿는 사람들은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어떠한 순간에도 인류는 존재해야 한다’는 원리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과학자들의 신념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왜 종말론이 이렇게 득세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종말을 집단의 종말로 믿고 싶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른다. ‘유한한 자원의 지구에서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는 인간이 언젠가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란 주장은 그리 신선하지도 놀랍지도 않다. 언젠가 우주를 떠도는 거대 혜성과 부딪쳐 지구가 산산조각이 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날이 1999년, 혹은 2012년에 올 것이라는 주장으로 뒤바뀌는 순간, 그것은 ‘멸망’이 아니라 ‘종말’이 된다.
지구에 대한 비극적 미래 예측과 인류에 대한 묵시록적 전망은 그것이 ‘위기의식을 고취하고 인류의 각성을 목적으로 할 때에만’ 유효하다. 과학자들은 대개 이런 목적 아래서 ‘위험한 전망’을 발표 자료에 담고, ‘우울한 통계’를 자신의 논문에 싣는다. 그것이 예언된 종말이 아니라 인간의 실수가 만들어내는 멸망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에.
그러나 종말론을 통해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고 그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하려 할 때 ‘사이비’ 딱지가 붙는다. 미국 콜로라도에서는 ‘2012년 지구 종말’에 대비해 지하 벙커를 건설할 돈을 받아 챙긴 사기꾼들이 대거 잡혔다. 실제로 미국 슈퍼마켓에선 2012년 종말에 대비해 휴대용 식수정화 장치, 방독면, 자외선 차단 담요, 태양열발전기 등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 한때 내리막길을 걷던 미국의 무속신앙인 ‘부두’가 종말론 이후 부적과 양초, 기도용품을 팔아 기사회생했다는 소식은 한없이 우울하기만 하다.
가장 위험한 건 종말론 그 자체아이작 아시모프의 공상과학(SF) 단편 ‘전설의 밤’(Nightfall)은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태양이 6개나 떠 있어 낮만 지속되는 어느 행성에 1천 년마다 한 번씩 ‘밤’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밤의 공포를 이기지 못해 어둠이 들이닥치는 순간 자신들의 문명을 불사른다. 자연현상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래서 시속 160km로 달리는 (박찬호의 공보다 빠른!) ‘달’ 위에 정교하게 우주선을 착륙시키는 현대사회에서도 ‘일본 지진은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공존하는 이상, 우리 문명을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은 ‘종말론 그 자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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