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문화평론가 진중권에게 성격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까칠한 현정씨’
몇 달 전 우연히 그가 있는 자리에 끼어들 기회가 있었다. 미모는 글자 그대로 ‘압도적’이었고, 태도는 날것 그대로라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내 성격이 처음 보는 이에게 이미 몇 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 정도로 사교적이지 못한데다, 자신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성격에게 ‘연기가 참 좋았어요’ 어쩌고 하며 빈말을 건네는 것도 실없는 짓인지라, 화법적으로(?) 그리 편하지는 않았던 자리로 기억한다. 아무튼 그는 내게 성격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중 하나다.
혜린과 미실
그를 처음 본 것은 드라마 를 통해서였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 드라마를 “연기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 촬영한 작품”이라 했다. 당시 이 드라마가 일으킨 선풍적 인기는 지구 건너편에까지 전해져, 독일 베를린의 유학생들은 순서를 기다려가며 드라마 전편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곤 했다. 나 역시 그걸 다 보느라 꼬박 며칠 밤을 새웠다. 매사에 비판적인 운동권 학생들이 이 드라마에 넋을 잃고 몰입할 수 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드라마 속의 혜린은 우리의 ‘죄책감’을 대표했다. 물론 드라마 속 혜린의 집안 정도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운동권 학생들은 웬만큼 사는 집안의 자제였고, 지금과 달리 그때는 대학생이 졸업만 하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기득권’ 신분이었다. 정치적 독재 아래 신음하는 국민과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저 혼자 잘 살겠다고 공부만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죄악’으로 여겨졌다. “내 옆에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말은 가시처럼 아프게 우리의 양심을 찔렀다.
“걔네들은 데모하는데 나는 배고파서 쌀 사왔어.” 혜린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의 대사는 TV 앞에 앉은 모든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어느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 장면을 찍을 때 “속에서 진짜 뭔가가 올라왔”다고 술회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혜린의 연기를 이 대사와 더불어 기억한다. 하지만 내게 그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노조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받아 정신이 돌아버린 여공을 붙들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당신들이 이렇게 살면 나는 미안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는 장면이었다.
그 뒤 그는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다. 8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그는 이른바 ‘성숙해진’ 모습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서 ‘현실’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인터뷰 속에 묘사된 결혼생활이 내게는 차라리 비현실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령 며느리의 활동을 제약하는 가문의 얘기는 재벌가를 다룬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고, 교양과 유머와 매너를 갖춘 남편이 일요일마다 아내를 위해 요리하는 것은 CF에나 나오는 장면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드라마 같은 세계가 정말 존재하는 모양이다.
결혼생활을 통해 그는 프레임의 안팎을 오가며 자신이 연기에 몰입된 상태를 메타적 관점에서 바라볼 여유를 얻었다.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말하자면 저는 한동안 완전히 다른 세계에 가 있었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연예계를 흥미롭게 보면서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곳이죠. 그런 상황에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보이기 시작한 게 있어요. 어떤 상황 내부에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빠져나와 생각하고, 다시 그 장면을 풀숏으로 넓게 보기도 하고 내부로 쑥 들어가서 보는 상황에 많이 단련됐어요.”
2005년 드라마 을 통해 복귀한 그는 와 를 거쳐 을 만나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에서 그는 조연이었으나, 인상적 연기로 사실상 주연이 되었다. 배역의 아우라에 배우의 아우라가 결합해 탄생한 미실의 카리스마는 복귀한 배우의 새 연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연기는 의 서혜림 쪽이 더 힘들었나 보다. “미실은 복장만 하고 있어도 충분히 설명되는 캐릭터였고, 서혜림은 거의 알몸으로 만나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애착은 서혜림에게 더 가요.”
하지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정작 내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성격이다. 언젠가 그는 홍상수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이상한 현학적인 말로 나를 헷갈리게 하지 마라. 나 그런 말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다 안다.” 그의 영화 속 찌질한 지식분자들을 제대로 다룰 유일한 여자는 고현정으로 보인다. 그는 후배들에게도 이렇게 얘기한단다. ”너 혹시 ‘알고 보니 똑똑하다’는 얘기 듣고 싶은 거니? 나도 그런 거 있었거든. 똑똑해지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하긴 싫지? 그렇지만 살짝살짝 ‘저 사람 의외인데?’ 하는 반응을 얻고 싶지? 그러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돼.” 이어서 덧붙이기를, “근데 너 그게 굉장히 시시한 일이라는 건 알지?”
그는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힘들어한다. “엄마라도, 정말로 아끼는 사람이라도, 나의 이런 부분은 좀 안 건드렸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요. 흔히 ‘내가 얘랑 안 지가 10년인데’ 하며 치고 들어가지만 저는 서로 그런 실례를 안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의미 없이 오가는 대화의 공허함. 그는 ‘언제 밥 먹자’고 말만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런 말을 하면 꼭 먹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칭찬하지 않는 것도 싫어한다. 연예인들이 ‘팬이에요’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면,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는데?’라고 꼭 되묻는다.
그가 공허한 매끄러움보다는 차라리 솔직한 뾰족함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예인이 너무 바람직해도 재미있지 않더라. 어느 한에서는 울퉁불퉁한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물론 나도 제작발표회 같은 데서 매끄럽게, 판에 박힌 얘기만 하며 안전하게 갈 수 있지만 그게 과연 대중에 대한 배려, 혹은 대접일까?” 연말 S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벌어진 사고(?)는 이미 예고돼 있었던 셈이다. 거기서 그는 제작 과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려다가 그만 대한민국 국민의 5대 의무 중 하나, 즉 ‘싸가지 소지 의무’를 위반하고 만다.
주민증은 놓고 다녀도 되나, 싸가지는 늘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게 대한민국이 아닌가. 빗발치는 비난과 지인들의 권유로 결국 그는 기쁨에 들뜬 “배우의 어리광”으로 봐달라는 사과문을 올렸다. “회초리”로 맞은 듯 “정신이 바짝 든다”는 그의 말에 대중은 “배우의 존재 근거는 대중임을 재확인”하고 만족해했다. 하지만 곧바로 가진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강요된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 그의 사과가 그의 진심을 담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에게 실망할 것이다.
‘배우 광대’와 ‘대중 귀족’
최근 어느 신문에 그에 관한 짧은 기사가 실렸다. “데뷔 20년차 배우 고현정이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소견을 밝혔다. 고현정은 최근 방송인 김제동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연예인은 무대에 선 광대고, 객석에 앉은 대중은 귀족이다. 우린 돈과 시간을 투자한 관객들을 어루만지고 즐거움을 줘서 보내야 하는 거다’고 말했다.” 이 ‘배우 광대-대중 귀족’의 신분제에 감동을 받았던지 기사의 말미에 기자는 이런 찬사를 덧붙였다. “그의 연기에 혼신의 힘이 담긴 이유가 있었군요!”
하긴, 다른 곳에서도 고현정은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거기엔 한마디가 더 붙어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건 배우는 광대라는 거야. 대중이 바깥에서 구경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부디 우리 인간 자체는 구경거리가 되지 말자. 그건 아주 후진 거거든.”
진중권 문화평론가
<hr>가십 대상 거부, 솔직한 발언, 관객을 따르기보다 주도하는 21세기형 배우
추정컨대, 영화배우 고현정의 오른손 약지는 검지만큼 길거나 심지어 더 길지도 모르겠다. 아직 악수를 해보거나 그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본 적은 없지만, 이런 추정은 두 번 정도 가진 그와의 가벼운 대화 덕분이다.
그와의 대화는 한밤이라도 매우 유쾌했다(두 번째 회동은 재래시장 근처에서 무려 새벽 1시가 넘었으니까). 그는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했고 유머가 넘쳤으며, 솔직하면서도 담백한 발언으로 대화의 정곡을 찔렀다. 좌중을 휘어잡았지만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배려가 몸에 배었고, 직설적이었지만 무례하지 않았으며, “제가 공부가 짧아서”라고 겸손했지만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짐작하듯, 빼어난 외모에 훤칠한 몸매는 누구보다 여성성을 드러내지만, 그와 말을 섞어보면 그가 ‘대한민국에서 Y염색체를 가장 많이 가진 여배우’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자연스럽고 일관된 ‘두목 기질’
우리 신체 중에서 성기관을 제외하고는 신체 사이의 길이 비율이 남녀 간 차이를 보이는 곳은 ‘오른손 검지와 약지’뿐이다. ‘검지와 약지 길이비’(2D:4D ratio)는 임신 13주차 때 자궁 내 남성호르몬의 농도가 높을수록 작아진다. 그래서 남자는 대개 약지가 더 길며, 여성이라도 남성적 성향이 강할수록 약지가 길어져 검지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길게 된다.
여성성과 섹시함을 한껏 드러내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중무장한 대한민국 여배우들이야 당연히 길고 가녀린 검지를 가졌겠지만, 고현정만은 예외이리라 추정한 것은 그가 그동안 맡아온 배역들 때문이기도 하리라. 드라마 의 혜린은 보디가드 백재희(이정재)의 보호를 받지만, 당차고 단호한 캐릭터였다. 의 미실이나 의 서혜림 역에선, 나라를 호령하는 역할을 수행함에도 조금의 억지스러움이 없었다.
고현정이 수사반장으로 분해 액션연기까지 펼친 드라마 에서나 9살 연하와의 티격태격 애정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 에서도 그는 소탈하고 솔직하며 남자에게 의지하려는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는 흔히 ‘남성적’이라 꼽는 성향을 넘어 ‘우두머리 기질’이 농후하다. 그와 인터뷰를 했던 김혜리 기자는 책 에서 그의 연기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캐릭터를 “두목 기질”이라 칭하며 “자기를 속이려는 상대를 측은하게 여기고, 존경할 만한 맞수한테 반하고, ‘내 사람’을 싸워서 지켜내려는 강자가 그녀다운 캐릭터”라고 말한 바 있다. 의 미실이나 의 서혜림 역으로, 우리가 작가나 PD라고 해도 ‘고현정’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라 생각되는 점도 그 때문이다. 영화 을 보라. 영화의 무게중심은 배우 윤여정과 이미숙이 단단히 잡고 있지만, 극의 흐름을 이끌고 갈등을 일으키고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던 고현정은 그곳에서도 단연 ‘실버백’이었다.
그가 맡은 우두머리 역들이 관객에게도 자연스러워 보인 데는 그의 현실에서의 삶도 기여했을 것이다. 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 재벌가와의 결혼, 비밀에 부쳐진 사생활과 간간이 들리는 기사는 경호원과의 구설. 분명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잘 알지 못하는 ‘10년의 공백’과 당당한 이혼이 크게 한몫했을 거란 얘기다.
전략적이지 않은 솔직함
배우란 ‘시대의 페르소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삶을 대변해줄 존재라는 점에서, 고현정은 분명 20세기 여배우의 전형인 ‘아메리칸 스위트’(줄리아 로버츠로 대변되는 멜로영화의 여주인공)는 아니다. 여리고 약해 남성이 보호하고 사랑해줘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관계를 주도하고 독립적이며 귀여움이나 여성스러움으로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캐릭터다.
그런 점에서 20세기에 태어났지만 그는 ‘21세기형 여배우’다. 우리가 그런 여배우를 갖고 그가 맡은 역할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각광받는 것은 전적으로 지금이 21세기를 훌쩍 넘겼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적 틀이 무너지고, 여성에게 기대되는 성격과 능력이 다양해지고, 장르드라마의 속성도 다각화됐기 때문이리라. 그 덕분에 사랑받기 위해 애교와 앙탈을 부리고, 오해와 질투 때문에 남자 앞에서 영롱한 눈물을 쏟아내고, 매서운 바람에도 픽픽 쓰러지는 가녀린 여배우들 사이에서, 청순미보다 강인함을 보여주는 배우 고현정을 얻게 된 것은 무척이나 다행이다.
그럼에도 좀더 정확히는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 광고 등에서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다. 그는 배우임에도 그저 ‘관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이 배우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마음이 없다는 점에서 향후 ‘관객과의 불화’가 예견된다.
이미 그는 연기대상을 받는 시상식 소감으로 관객에게 “배우들을 이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고, 돌출 발언을 종종 일삼아왔으며, 동료들과의 의리를 위해 ‘뒷얘기가 나올 법한 일’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전야제에서(아닐 수도 있다!) “만약 어두운 밤거리에 치한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미스코리아 후보 고현정은 “그 치한의 가운데를 걷어차겠다!”고 당차게 대답했다. 사회자나 관객이 기대한 대답이 무엇일지 모를 리 없는 그는 솔직히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전략은 고민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20년 전에 했던 이 말은 미실과 서혜림을 관통하며 2011년 ‘오늘의 고현정’에게 남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무의식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민되는 건 고현정 아닌 관객의 미래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배우 고현정의 미래가 아니라, 배우를 바라보는 대한민국 관객의 미래다. 우리가 준 애정으로 먹고살며, 그 덕분에 엄청난 부를 누리는 ‘스타’들에게 관객의 권력을 이따금씩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래서 적절한 꼬투리가 나타나면 스타의 권좌에서 그들을 냉혹하게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풍토에서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영화를 찍을 배우는 많지 않다. ‘스타의 개런티란 악플을 감당하라고 주는 정신적 맷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한 시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진 배우’를 얻지 못한다.
관객의 기대를 크게 괘념치 않으며, 볼거리와 가십의 대상을 당당히 거부하며, ‘관객과의 불화’ 불씨를 모락모락 지피고 있는 배우 고현정. 그는 21세기 대한민국 연예계의 리트머스시험지다. 그가 오랫동안 살아남는 영화판이라야, 드라마판이라야, 그게 정상이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바이오 및 뇌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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